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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축복 심방 설교 자료1 (kcdc 유료 자료)|===요약설교

강윤관 2015. 3. 27. 09:41

 

 

축복 심방 설교 자료(kcdc 유료 자료)|요약설교
호현낙선 | | 조회 0 |추천 0 | 2014.04.17. 16:11 http://cafe.daum.net/sungsansarang/hDQd/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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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의 통로가 되는 믿음(창 12:2)

찬송 : 563장(예수 사랑하심을)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나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다른 사람도 복을 받게 하는 “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로부터 복이 시작되고 자녀대로 흘러가고 자자손손 복을 받게 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습니다. 나로 인하여 친척과 이웃이 복을 받는 복의 출발점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늘 축복의 통로자입니다. 반대로 가장 불행한 자는 “화의 통로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화를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도 화를 전달하고 다닙니다. 언제나 불평과 불만을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남이 고난을 겪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2011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의 통로자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90

 

1. 축복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복"자체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로부터 시작해서 자손들에게 축복이 전달됩니다. 축복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눈덩어리가 굴러갈수록 커지는 것처럼 그가 가는 곳마다 축복이 전해졌습니다. 축복의 통로자가 되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가문의 축복의 근원으로 당신을 불러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모든 이웃의 축복의 통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축복의 조상과 통로자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축복의 근원으로서, 축복의 통로자로서 엄청난 축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축복의 조상은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당시 고향산천을 떠나 낯선 땅으로 이사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입니다. 생계가 보장되지 못하는 절망과도 같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축복의 근원과 통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자로서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만물은 모두 다 독특한 목적을 각지고 만들어졌습니다. 자기의 살아가는 사명이 있습니다. 특별히 비인격적인 것도 목적과 의미를 위해 살아가고 있듯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가문과 친척과 세상을 위해서 “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생각과 말과 행실로 축복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된 아브라함은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제단를 쌓았습니다. 그가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나, 집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세겜과 벧엘에서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헤브론과 브엘세마와 모리아에서도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모리아산에서는 하나밖에 없었던 독자 이삭을 드리는 제단을 쌓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축복의 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손의 축복을 위해 거룩한 씨를 뿌릴 줄 아는 성도가 되는 것은 참으로 멋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축복의 통로자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우선순위로 실천하면 2011년은 나 때문에 온 가족과 친척까지도 하늘 복을 받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믿음의 귀한 약속을 지킴으로 인해 인류역사와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계위에 기독교의 세계 속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독보적인 존재처럼 떠오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중에서 아브라함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의 이름과 명성을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영원토록 길이 남을 위대한 이름이 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은 복을 받습니다. 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처럼, 땅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역사와 믿음과 축복을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로 대대로 이어갔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으로 사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 우리 눈에 보이는 축복(창 13:14-15)

찬송 : 302장(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1864년 덴마크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기름진 남부의 두 주를 빼앗기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고 잘못하면 덴마크는 이제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국민들에게 소망의 나팔을 불고 나온 사람이 바로 “그룬트비히” 목사였습니다. 그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혼란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 라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농민학교를 세워 성경을 기초로 한 정신적인 자원을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마음에 힘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 땅에 들어가서 늪지대의 물을 퍼내고 온갖 어려움과 싸우면서 개척해 나갔습니다. 덴마크는 그 후 백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낙농국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또한 자원을 개발해서 공업국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많은 나라로 성장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2011년 우리도 그런 축복이 임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큰 꿈을 품어야 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목표도 없고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확실한 꿈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어떠한 역경도 이겨 나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꿈과 희망을 갖고 함께 고생을 나누며 서로 손을 잡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믿음으로 나가면 어떠한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미래에 대한 원대한 꿈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2011년은 갈보리 십자가를 힘차게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의 능력으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그 꿈을 이루아가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2. 큰 믿음을 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시인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입으로 “아멘”하면 됩니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은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현실로 인해 안타깝고 슬픔에 빠질지라도 이곳에서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꿈으로 가득 찬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 된다, 승리한다, 이긴다."는 큰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에 해당되는 하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사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3. 큰 인내를 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것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해서 반역하기도 하고 이방족속을 따라 타락하고 뒤로 물러가려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불과 일주일이면 들어갈 가나안 땅을 40년이나 방황했습니다. 올 해 우리에게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이 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약5:10) “항상 함께 하리다”라는 말씀을 믿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해결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 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마음에 인내를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그 교훈과 훈련을 다 하신 후 에 대지 위에 우뚝 서게 만들어 주십니다. 대망의 새 해 2011년 참으로 큰 희망과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나오는 희망찬 꿈을 가슴속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을 함께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참 좋은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 같은 하늘 복을 받는 기회가 주어지는 2011년이 될 것입니다.

 

3. 자손만대까지 이르게 하는 하늘 축복(창 22:17)

찬송 : 17장(사랑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신앙과 축복의 조상이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축복을 계승하고, 그에게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축복은 당대에 대한 축복만이 아니라 그 후손까지 축복이 임하는 엄청난 복이었습니다. 수천 대까지 받을 하늘 복이 자자손손 이어지는 약속이 있는 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축복이요, 이삭이 받은 축복을 야곱이 받고, 계속해서 축복이 계승되어지는 것이 성서의 약속입니다. 모든 부모님의 소원은 자신들만 축복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축복은 눈에 보이는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 같은 축복이 아닙니다. 이 축복은 보이지 않는 신앙의 유산을 남겨줌으로 계속해서 그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되는 복입니다. 그런 축복을 우리도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비결을 얻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1.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 사람을 향해서 축복을 기원하면 도리어 그 사람이 축복을 받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 복 받은 백성을 향해서 저주하던 자기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예배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앞에 형식이나, 외식이나, 의례적인 예배가 아니라 중심에서 나오는 충성심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바치는 심정으로, 진지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주실 것입니다.

 

2. 여호와께 드리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에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다`는 찬송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아낌없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영역에는 반이나 사분의 삼 정도의 헌신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적인 믿음을 드릴 때 그 믿음에 해당되는 전적인 복을 받습니다. 전적으로 아낌없이 헌신하고, 아낌없이 헌신할 때에 아낌없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아낌없는 신앙, 전적인 헌신을 통해서 지금 여러분과 여러분 후손들에게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말씀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무조건 갔습니다. 그는 상식이나, 세상 지식이나 지혜나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통해서 만민이 복을 받고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계셔서,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죄를 짓게 되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이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후손이 번성하는 복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복입니다. 부모들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대까지만 복을 맏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이삭과 야곱과 수천 대에 이르도록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믿음으로 씨앗을 뿌려 놓으면 우리 자손들이 할아버지 때문에, 증조할아버지 때문에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축복의 씨앗을 많이 뿌리시기 바랍니다. 내 당대만 하늘 축복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나로\를 통해서 열린 하늘 축복의 문이 영원히 닫히지 않고 내 자손들이 축복을 계속에서 받을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는 이 순간이 바로 그 축복의 농장에 후손들을 위해서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자식과 손자들, 자자손손이 내가 축복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그들이 축복을 받는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아낌없이 헌신하는 신앙, 말씀을 준행하는 신앙을 통해서 받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과 후손들이 번성하는 축복이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 만사형통의 비결(창 26:4)

찬송 : 428장(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입니다. 그런 만사형통의 복을 받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주고받는 원리를 살아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축복은 다릅니다. 복은 복 받을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특히 100배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100배의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고받는 원리’입니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서 ‘야-호’하고 외치면 공기의 진동을 거쳐서 ‘야-호’하고 메아리쳐서 내게 다시 돌아옵니다.‘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하면 산울림도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저주한다.’하고 외치면 산울림도 그대로 내게 응답해 온다고 합니다. “이놈” 하면 저쪽에서도 “이놈”합니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장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시 109:17~18). 말씀처럼 주고받는 원리대로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 하늘 문이 열리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심고 거두는 원리를 살아야 합니다.

심지 아니하고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콩 심는데서 콩 나고, 팥을 심었으면 팥이 납니다. 콩을 심고 팥을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이 천리의 원칙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고 말씀합니다.

215년 전에 미국에 에드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육자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한 아다요크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는 요정업자이다. 이 두 사람의 후손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에드워드 자손들은 대학교 총장 13명, 국가의 고급 관리가 83명, 문학자가 60명, 의사가 60명, 육,해,공군 장교가 75명, 대학교 교수가 86명, 목사. 선교사가 100명이나 되었지만, 아다요크의 자손들은 거지가 310명, 전과자가 130명, 절도범이 7명, 성병환자가 440명,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이 20명(10명은 감옥에서 직업을 배운 자)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의인 에드워드는 의의 씨를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었고, 요다요크는 불의와 죄의 씨를 심어서 그대로 열매를 거두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의롭게 살면 형통합니다.

 

3. 의롭게 사는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의인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의인으로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노력해도 그것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더하시는 복이 그 위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영적 교제를 통하여 불신자들을 영적, 정신적인 면에서 압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위력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삶에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현실적으로 사랑하며 말씀대로 살아왔는지를 점검하고 날마다 말씀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마치 바둑을 둔 사람들이 “복기”하면서 “폐착”를 찾아서 다음 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슬프게 한 만남과 장소와 말과 행실을 점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이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절)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시면서 최후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이 되게 노력하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바로 만사형통의 복을 누리면서 사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100배의 복은 먼저 위대한 하나님의 레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비젼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불타는 욕망과 위대한 신앙으로 만사형통의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 주님, 제게도 야곱의 축복을...(창 27:28)

찬송가 : 552장(아침 해가 돋을 때)

 

야곱은 아브라함 이삭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축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받기만 하면 반드시 그 축복이 자신에게 임할 것 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의 제안에 따라 형처럼 꾸며 아버지를 속이면서 까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 받기를 원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늙고 병들고 눈까지 멀었지만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줄 사람은 이 아버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종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줄 수 있는 이 세상에 유일한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부모가 늙고 병들었다고 할지라도 무시하지 말고 잘 대접하여 부모들로 하여금 자식에게 복을 빌어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야곱의 축복이 임하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을 이어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1. 주님의 성품을 품어야 합니다.

꼬리처럼 살 생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꼬리가 되는 성품이 있어야 하지만, 머리가 되고자하면 머리다운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복으로 만족하는 사람보다는 큰 복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똑같은 큰 성품을 품어야 합니다. 그 성품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 성품의 특징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도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용서가 작은 자에게는 그의 축복과 지위도 작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가 큰 자에게는 그 축복과 지위도 크게 하실 것입니다. 용서가 적은 자! 하나님은 그에게 주시는 사람도 적게 하실 것입니다. 용서가 많은 자! 하나님은 그에게 주시는 사람도 많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을 얻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주님의 성품대로 큰 용서를 실천함으로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겸손을 품어야 합니다.

닫힌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마음을 닫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교제 없이 혼자 고독에 빠져 삽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늘 절망감과 두려움에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남한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응답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를 받습니다(대하 7:14). 또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시고(시 10:17), 겸손한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시 147:6).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잠 3:34), 지혜를 주십니다(잠 11:2).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존귀하게 됩니다(잠 15:33).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 납니다(사 29:19).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마 23:12). 교만한 사람은 멸망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계속해서 번창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함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이 겸손의 신앙을 실천하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교인의 부족한 삶을 더 많이 목격하기 때문에 비판거리가 많아졌을 수 있습니다. 아마 상처도 많았고 실망거리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교인됨을 소중히 여긴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교회와 교인을 더 훌륭히 여길 줄 아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족한 모습이 보여도 세상 사람들보다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비판주의자는 하나님의 복된 머리가 되는 축복을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연히 머리가 되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머리가 되는 순간부터 그 자신도 필연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판주의자가 정당하지 못하게 비판한 만큼 다른 비판주의자에게 비판받게 하십니다. 남을 비판할 그 기준으로 먼저 나를 비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하늘 복을 이어가는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복 받은 자가 된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 너와 함께 자손들까지(창 28:4)

찬송 : 289장(주 예수 내 맘에)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오 놀라운 구세 주 예수 내 주>,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등, 약 2천여 편의 찬송가를 쓴 “화비 크로스비”라는 찬송가 작사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시력을 잃고 평생 앞을 보지 못하고 사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는 항상 활기차고, 희망적이고, 밝았습니다. 그의 시를 읽은 사람은 누구도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몰랐습니다. 저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캄캄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렇게 밝은 노래가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비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꼭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즉 축복을 하는 인사가 그의 인사였다는 것입니다. 92세까지 살다간 그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사함으로 복을 받은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축복을 하면 그가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결국은 내가 복을 받는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순례의 길을 떠나도록 종용합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피난을 종용하는 동시에 그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도 빌어줍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장본인입니다. 이로 인해 형 에서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야곱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도피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비록 저주를 받고 혼이 날 짓을 했지만, 용서가 앞서 있었기 때문에 저주 대신에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복을 주사”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지금도 우리를 행해 똑같은 축복의 말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후손에게 주실 축복을 예비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해 볼 때 야곱은 형의 축복을 가로챈 욕심쟁이 아우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또 다른 경륜을 보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의 계획과 경륜 속에 이루어지는 축복이며 선택된 백성 안에 주어지는 축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는 어떤 잘못도 용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 인간적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두텁고 진한 사랑은 아마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보다 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순수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헌신적 사랑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야곱과 결별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크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과 믿음이 더욱 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고생문이 열려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끈이 감사의 끈과 찬송의 끈이 끊어지게 하면 안 됩니다. 끊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하늘의 별과같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넘치도록 많은 후손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 복은 이어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복,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과 그가 거했던 땅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어렵고 힘든 순례의 길을 떠났듯이 이제 우리들도 순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신앙을 간직한 채 불신앙적인 세상 속을 걸어가고, 하나님을 위해 세상 욕심을 포기하고, 세상의 자랑과 이익을 포기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순례의 길에는 선택된 축복의 자녀만이 온전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 계속 보호하심이 이어질 줄로 믿고 당당하고 기쁘게 그 길을 동행할 수 있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과 기업,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약속가운데 땅과 기업에 대한 약속이 많았습니다. 땅을 허락하시는 것은 이 세상가운데 모든 선물의 중요한 근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땅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큰 약속을 이루어가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1년 한 해 동안 주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땅의 축복, 자녀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7. 꿈속에서 확인된 야곱의 믿음(창 28:14)

찬송 : 344장(믿음으로 가리라)

 

세계 제 2차 대전 때,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치열했던지, 급기야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한 영국군 병사가 독일군 병사를 총검으로 찔렀습니다. 칼에 찔린 병사가 죽어갑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성경책 한 권을 꺼내어 자기를 찌른 병사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여 이것을 주노니 읽고 구원을 받으시오”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물론 흔하지 않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독일군 병사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죽이는 원수를 향하여 미움과 분노의 저주를 퍼부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읽고 구원을 받으라고 축복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해치고, 괴롭히는 사람을 향하여 바락바락 대들면서 욕하고, 싸우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위하여 축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누구나 잘되고 형통하고 일이 평범하고 순탄한 삶이 진행 될 때에는 믿음 생활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진행이 가파르고 때로는 벼랑 끝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좌절 가운데 있게되면, 자신의 신앙생활의 형통함도 큰 풍랑을 만나 시련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든 집을 떠나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꿈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꿈은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동행과 축복을 확신하게 할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돌을 베개 삼아 외롭고 슬픈 잠을 자는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생각지 않은 놀랍고도 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에게 보여주신 비전 즉 계시의 내용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에 하나님의 사자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자신의 누운 곳으로부터 하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는 성경 중 이곳에 한 번만 나타나는 낱말입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부단한 대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특히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죄 중에 있는 사람 사이의 영적 친교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는 하나님의 보호의 표징인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통의 길인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요 1:51). 이 사닥다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의 사다리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때 우리의 좌절과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보다 더 강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과 언약하셨고(창 12:3), 이삭과 언약하셨으며(창 26:4), 이제 야곱과 언약하시기 위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이 곳 벧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개인적 접촉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음의 두 가지의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첫째, 그 땅을 주시며, 자손의 번성과 메시야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기업의 축복을 야곱에게 다시 약속하였고, 후손을 티끌처럼 많게 하시겠다는 자손 번성도 축복하셨습니다. 이 축복은 야곱에게 있어서 일신의 안전도 기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큰 보장이요 위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고 메시야를 통해 세계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갱신하셨고, 축복의 땅과 후손에 대해서도 재확인하셨습니다. 야곱은 언약의 계승자로서 정통성을 확실히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 야곱의 축복은 신약 성도들에게도 계승되었습니다.

 

둘째,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는 축복입니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여기서 하나님은 야곱과 친히 함께 하심을 확증하셨고, 지속적인 보호와 완전한 신뢰의 관계를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을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이 당장 필요로 하는 현실적 큰 보장이었습니다. 이 축복은 모든 성도에게 반복되고 성취되는,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귀한 약속인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이 꿈에 대한 확신을 갖고 기념의 돌을 세우고 하나님의 전을 약속했습니다. 십일조를 약속했습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복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서약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드린 서약대로 살아서 복 받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8. 축복의 음성을 듣는 야곱(창 28:15)

찬송 : 510장(하나님의 진리 등대)

 

야곱은 쓸쓸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다 하나 아버지가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롭고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물론 나이 많은 아버지와 동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모든 것을 미리 챙겨 주시던 어머니가 동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외롭고 지치는 여행길에서 벧엘에서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꿈속에서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늘로부터 땅으로 사닥다리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합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18:13). 야곱은 이 음성대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1. 사방에 충만하리라

오늘 주신 말씀은 야곱이 잠이 든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손이 티끌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축복하십니다. 티끌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람에 날려 먼 곳까지 날아갑니다. 야곱의 후손도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입니다. 동서남북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꿈속에 들은 말씀이라도 희망의 말씀입니다. 지금 야곱은 혼자입니다. 혼자 있는 야곱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축복은 희망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지금 맨 몸이지만 많은 후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사방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야곱의 후손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우리도 간직하고 사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모든 족속과 관련 있으리라

야곱의 후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지면 필연코 이방인들을 만나고 섞여 살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환영받을 수도 있고, 미움이나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배척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야곱은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섞여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배척받을 수 있습니다. 공연히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삽니다. 세상을 등지고 살기 어렵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세상 속에 삽니다. 그러나 말씀과 함께하시는 주님과 함께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너로 인해 복을 얻으리라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배척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배척받은 것이 이런 이유입니다(행 16:19).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결과적으로 유익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예수님을 소개받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복을 얻습니다. 야곱에게 이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야곱과 야곱의 자손으로 인해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습니다. 땅의 모든 백성에게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복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통해 직장과 학교, 이웃과 우리나라, 전 세계가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복을 전달하고 나누어주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병기라는 청년이 전쟁터에서 전사를 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어머니는 창가에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애처로운 질문을 하였습니다. "왜 그 애가 탄 차는 이렇게 더디 옵니까?" 이것이 그의 어머니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과거의 자랑도 없고 미래의 소망도 없이 그는 생의 어떤 기쁨이 소생되기를 헛되이 기다리며 늙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인생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도 무익한 때를 만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새로운 축복을 하여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최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듯을 준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약속을 믿고 실천에 옮기는 자에게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어느 날 꿈속에서 보았던 일들이 지금 바로 자기 앞에 펼쳐지는 결과를 보게 됩니다. 2011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꿈속에서 듣고 현실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보는 아름다운 영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9.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출 13:21-22)

찬송 : 545장(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옛날 소련 경찰은 독일 히틀러의 학정을 피하여 소련으로 넘어온 유대인들을 붙잡아 독일로 넘겨 짭짤한 수입을 얻었습니다. 소련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과 도망쳐온 유대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경찰에 들켰습니다. 잡히면 독일로 끌려가 죽을 판입니다.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이 힘껏 달아났습니다. 경찰도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쫓았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이 섰습니다.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고 유대인은 여유 있게 신분증을 내밀었습니다. 경찰은 왜 신분증을 갖고 있으면서 도망쳤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의사가 약을 먹고 달리라고 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경찰이 재차 도망쳤다고 다그치자 유대인은 “경찰관님도 나와 같은 의사의 처방을 받은 줄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덕분에 독일에서 도망쳐온 유대인은 감쪽같이 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순간적으로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안전한 피난처를 주십니다. 순간의 지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오직 구름기둥과 불기둥만이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를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입니까?

 

1. 말씀의 불기둥을 따라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119: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이 우리 인생의 불기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갈 길을 인도해주는 이정표가 됩니다.

아프리카에 모펫 선교사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어린아이 하나가 모펫 선교사의 옷자락을 부둥켜 잡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선교사님, 동네 개가 내 성경책을 찢어 먹었어요." "그래. 하나님께서 새 성경책을 주실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려보자" "아니에요. 선교사님. 저는 친구들 가운데서 아주 나쁜 아이였어요. 그런데 성경책을 읽고 좋은 아이가 되었단 말이예요. 그 성경책은 보물가운데 보물이예요. 어쩌면 좋아요" 모펫 선교사님은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성경책이 너를 좋은 아이로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그 성경책을 찢어 먹은 그 개도 좋은 개가 될꺼야" 이 아이는 밝게 웃으며 선교사 곁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안내서입니다. 매뉴얼입니다. 그대로만 살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의 구름기둥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은 특별한 모습으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때 내 가운데 오셔서 나를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이미 성령님이 오셔서 도와주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성령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령님은 사역은 무대 위에서 대사를 잊어버리고 당황하고 있을 때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 같은 역할입니다. 내가 다른 길로 가고자 할 때 내 옷소매 자락을 살짝 잡아 당겨주는 것처럼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절대로 말씀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매사를 소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픈 심령이 치료를 받습니다. 어두운 세상가운데 비전을 갖게 합니다. 절망과 좌절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3. 가까이에 있는 구름기둥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많은 구름기둥과 불기둥같은 분들을 주셨습니다. 부모입니다. 좋은 목자입니다. 좋은 친구입니다. 주변의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소중한 구름기둥이 되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구역 안에, 많은 구름기둥과 불기둥 같은 분들을 세워놓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그 분들을 찾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아프리카에서 어떤 선교사님께서 주일 설교를 하시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안내하는 사공이 그만 길을 잘못알고 엉뚱한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그날 설교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목적했던 곳에 갔더라면 죽임을 당할 뻔했던 것입니다. 선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선교사가 도착한 다는 것을 미리 알고 숲 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몽둥이와 칼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내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여 그 길을 못 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길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사람들을 통하여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0. 위기에서 빛나는 하늘 능력(출 14:13)

찬송 : 370(주안에 있는 나에게)

 

사람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위기를 만납니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국가적, 정치적 위기, 경제적 위기, 관계의 위기, 질병의 위기 . . . 수 없이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때나 질병이나 우울증, 외로움 . . 이런 문제를 만나면 낙망하고 원망하며 신앙을 버리고 타락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다 이런 위기를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진퇴양난의 위기상황을 주시는 이유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믿을 때 위기에서 일하시는 하늘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위기가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일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괜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말에 “걱정도 팔자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두려워서 동산 뒤에 숨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한 번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것에 묶여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극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안절부절한다고 일이 됩니까? 내가 나서고 설치면 오히려 하나님은 잠잠하시고 침묵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말씀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우리의 나가던 바대로 나아갈 때에, 우리 앞에 있는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믿고 따라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성을 보라는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기병대, 절박한 위기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본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말씀가운데 보는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역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역사를 눈으로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봅니다. 모세는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만났습니까? 환난을 만났습니까? 문제가 있으십니까? 모세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그 위기 속에서 일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3.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금물입니다. 가끔 우리도 이해 할 수없는 것은 우리는 어떤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데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15) 이 말씀은 모세에게 이젠 두려워 떨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어찌할 줄 몰라 할 때에 이젠 손을 내밀어 홍해를 가르고 그 안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뒤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는 사람은 애굽의 포로가 되거나 물속에서 장례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모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전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나가라 하시니 그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진하니까 바로 어떤 일이 생겨났습니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전진하면 반드시 홍해가 갈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홍해가 많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경영하는 사업장에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앞에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있습니다.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홍해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잠잠하게 기도할 때가 있고 앞으로 전진하면서 장애를 넘을 대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11년 한 해를 사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는 내것”이라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 믿고 전진하는 신앙(출 14:14)

찬송 : 585장(내 주는 강한 성이요)

 

미국 어느 교회에서 전 교인들이 참석하는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오늘은 우리 성도들이 비 오도록 기도하자고 기도회로 모여 기도회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비가 쫘 악 하고 내렸습니다. 모두 비가 온다고 현관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고 갈 수가 없어서 모두가 서 있었습니다. 그때 주일학교 학생인 존이 우산을 착 펴서 쓰고 가는 것입니다. 그때 장로님이 “야 죤 너는 어찌 우산을 다 가지고 왔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존은 뒤를 돌아보면서 “아니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시도록 기도하려 모였으면 하나님이 비를 내려 줄줄 믿고 우산을 가지고 와야 되는 것 아니예요?” 그리고 우산을 쓰고 총총히 걸어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전진했습니다. 모세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믿고 전진하는 신앙을 살려면 우리도 이렇게 하면 됩니다.

 

1. 믿음의 손을 높이 들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직까지 나를 믿지 못하고 있느냐. 열 가지 재앙을 볼 때마다 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지 않았느냐 그러면 바다도 나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염려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면 되지 왜 염려하여 물어보느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곳 광야의 막다른 길로 몰아넣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곳 광야에서 죽게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열려져 있는 홍해의 삶이 아니라 열려져 가는 홍해를 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믿음이 없이 내어 딛으면 결코 열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홍해를 향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물로 들어가는 성도를 너무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절대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면 안 됩니다.

 

2.승리는 언제나 우리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것도 홍해로 몰아넣어 믿음을 시험하고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것도 최종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기적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전능하신 팔로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맛보는 순간 반드시 뇌리에 떠올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기적은 우리를 위한 것이로되, 그 기적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기쁨과 감사가 자신이나 사람에게 돌려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을 만나면 금방 두려움과 자포 자기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가 뒤에서 따라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서 자포자기하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세상의 악한 힘이 엄습하면 두려움이 밀려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 때문에 그들은 홍해를 건너야 했습니다. 바로가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홍해를 건넜겠습니까? 세상의 악한 힘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 진군합니다. 세상의 악도 우리 신앙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 부르짖고” 애원합니다. 그나마 뒤에서 적이 쫓아오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의 추격도 때로는 우리의 신앙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라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고 합니다. 자기 뒤에 미친 애굽인을 볼 때에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부르짖습니다. 바로의 군사들이 쫓아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구원이란 가장 큰 은총에 대한 감사보다 작은 부족 때문에 큰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감사가 작아지면 불평은 커지고, 감사가 커지면 불평은 작아집니다.

내일을 위하여 과거를 벗어버리십시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이미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마침내 하늘나라에 다다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올 한 해를 위하여 많은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장애물 경기에서 우승하는 사람은 수많은 장애물을 잘 넘긴 사람입니다. 지나고 보면 이미 과거입니다. 고통도 지나고 보면 기쁨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과거에 집착하거나 돌아가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는 한 해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원리(출 15:26)

찬송 : 471장(주여 나의 병든 몸을)

 

우리는 병이 나면 병원에 가서 진찰 받고 치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주는 처방전대로 약을 사서 먹습니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치료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발급해 주시는 처방전대로만 하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만병이 물러갑니다. 치유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처방전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처방전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리 소와 염소와 양을 잡아서 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불순종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진실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게 사무엘이 사무엘상 15장 22절로 23절에 “사무엘이 이르되 야훼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야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야훼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엄중하신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늘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이렇게 오늘날 고생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따라 의를 행하라는 처방전

의라는 것은 착하고 좋은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착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건강하게 사는 조건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착한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착한 일을 했다고 칭찬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십니다. 이사야 1장 17절에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런 착한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고 도와주고 협력해 주는 사람이 되고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일을 해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말씀 귀를 기울리라는 처방전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친히 두 돌판에 기록해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 10가지를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출애굽기 20장 1절로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첫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주님 한 분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은 우상을 싫어하십니다. 셋째는,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장난으로 부르고 농담으로 하나님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만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다섯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여섯째, 살인하지 말라. 일곱째, 간음하지 말라. 도덕적으로 문란하게 되면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듯이 멸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도둑질하지 말라. 아홉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송사가 생겼을 때 거짓증거해서 손해를 끼치게 하는 일은 하지 말고 정직하게 평론하고 살아야 합니다. 열 번째,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까 남이 잘되는 것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지 말라는 계명대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육신의 질병은 반드시 수술 받고 약만 먹으면 낫지 않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게 될 때 병을 이기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문제보다 크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므로,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절대긍정 절대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모신 하나님은 큰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무도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입어 예수 믿고 주의 자녀가 되었기에 예수를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서 문제가 해결되고 병마가 치료되는 형통의 복을 받고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3. 말씀과 함께(출 19:5-6)

찬송 : 285(주의 말씀 받은 그날)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마음속에 새겨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입니다.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의심 없이 먹고 소화를 시키면 그것으로 힘을 얻고 자기도 모르게 자라나는 것처럼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그것으로 인해 능력을 얻고 자신도 모르게 열매를 맺어나가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의 삶을 반성해 보면 말씀의 위력을 깨닫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이 약속이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천지를 창조하고 이 세상을 운행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자의 약속이란 말입니다. 이 약속을 붙드시길 소망합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내 계산 없이 내 생각 없이 내 상황을 버리고 가면 됩니다. 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전에 ‘두려워말라, 내니 두려워말라’ 는 말씀을 믿고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약속을 붙잡았지만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약한 모습만 보이지 말고 말씀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두려워말고 말씀대로 살면 형통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말씀 안에 살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해답 없이 살아가는 소경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입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불안한 삶이요 고통의 삶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인생의 해답이 있음을 알고 깨닫고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며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그리고 어떻게 계획하고 계신지를 알면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든 살지 않던 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항상 성령을 통해 간섭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면 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인데 그 소유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을 순종 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소유를 히브리어로 ‘세굴라’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진귀한 보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국보처럼 귀한 보물임을 알게 됩니다.

 

2. 말씀 안에 살면 제사장이 됩니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남들이 흘리는 눈물과 고뇌와 아픈 사연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는 자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주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그렇게 대단한 능력자도 아닌데 말씀대로 살아가면 이 시대의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베드로 전서 1: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우리를 택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붙들고 살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위대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제사장의 직위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3. 말씀 안에 살면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뜻이고 본질적 의미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귀한 유산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은 경우는 국민의 정서가 기독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폐단도 없지 않아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는 친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험에 빠지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구해주는 그런 사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민족의 정서를 보려면 장애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를 보면 대충 알게 됩니다. 미국은 장애인 천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애인 한 사람을 위해 의사 4명이 직접 와서 상태를 점검하고 장애급수에 따라 그에 맞는 학교를 다니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도 장애인들을 위한 베려가 몸에 배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사도 장애인 한 명당 한명이 배정되어 수업을 합니다. 이런 것이 위대한 유산이며 거룩한 백성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도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붙들고 있는 민족을 쓰십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교회를 쓰십니다. 그런 나라를 제사장나라로 그런 사람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십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붙들므로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의 특권을 누리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4. 천 대까지 이르는 하늘 축복(출 20:6)

찬송 : 1장(만복의 근원 하나님)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문의 연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잘해야 3대가 아니면 5대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천년이 아닙니다. 한 대가 50년이라고 상상하면 5.000년이라는 세월입니다. 천대에 이르는 복은 과연 어떤 복일까요?

 

1. 천대에 이르는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부모

부모는 신앙의 선구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닦아 놓은 신앙의 길을 물려주는 것이 최고의 유산입니다. 부모가 세운 신앙의 기념비는 자녀들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또한 좋은 부모란 신앙의 전수자입니다. 돈, 명예, 권세와 같은 유산은 자녀를 영원히 지켜주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지도층의 자녀들이 잘못된 유산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까? 요즘 부모들은 다른 것 못 해주는 것 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제일 중요한 신앙전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김으로, 신앙이 전수되는 21세기의 명문가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유산이 있는 가정을 천 대까지 축복하십니다. 지금까지 조상 덕을 가장 많이 보는 민족은 이스라엘입니다. 풍부한 지하자원도 국토도 없는 이스라엘이 2천 년간이나 방황하면서도 지금까지 생존한 것은 신앙유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꿈을 품고 사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천대에 이르는 신앙의 전수자가 되는 자손

자녀가 천 대까지 복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귀한 자식일수록 하나님께서 키우시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은 학원이, 과외 선생이, 컴퓨터가 자녀를 키우게 합니다. 반면에 한나는 귀한 아들인 사무엘에게 젖을 먹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물질의 자녀"가 아니라, "언약의 자손"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자손"들을 천 대까지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자녀의 성공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자녀에게 투자하기보다는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시 37:26).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혈통이 계속되도록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들을 언약의 자손으로 인치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과 같은 존재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결국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천 대에 이르도록 자녀들을 책임지신다는 믿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천대에 이르는 신앙의 통로가 되는 가정

좋은 부모는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천 대까지 축복을 주신다는 것은 중요한 명령을 담고 있는 위대한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가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천 대의 은혜와 복을 주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연 아브라함과 같은 부모인지 아니면 롯과 같은 부모인지 한번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롯은 눈에 보기에 좋은 것만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로 갔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 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 을 쌓았더라"(창 13:17-18). 아브라함에게 복된 땅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양쪽 자손은 시작은 같았으나, 그 끝은 전 혀 다른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번성했으나, 롯의 자손은 하 나님께 징벌을 받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참된 축복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실천하는 가정을 천 대까지 축복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하나님의 은혜가 1, 2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려 천 대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천 대까지 복 주시겠다는 것은 영원히 복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난도, 질병도, 고통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 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 천 대까지 영원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좋은 부모, 좋은 조상이 되면, 우리의 자손들이 천 대까지 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신앙 천 대, 자손 천 대, 축복 천 대의 가문을 이루는 믿음의 부모, 믿음의 조상으로 살 결심을 실천하고 사는 201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5. 축복의 문인 부모 공경(출 20:12)

찬송 : 577장(낳으시고 길러주신)

 

가정에 노름에 미쳐 지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 때문에 손가락까지 잘라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노름에 미친 아버지 때문에 장애를 입었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후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원망할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진히 효를 행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었는데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참다운 부모공경의 차원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어떤 처지나 어떤 상황에서도 공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다운 신앙인입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축복의 문인 것을 알고 실천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마음을 평안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성경 중에나 기독교사에 있어서나 부모 순종 잘한 신자들은 한결 같이 복을 받았습니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은 소외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작은 불순종이라도 부모는 마음을 크게 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매사에 언행심사가 거역됨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부모님께 순종하여 공경하셨음을 거울삼아 우리도 말씀대로 부모를 잘 공경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잠 17:1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말씀같이 을 보면 부모님의 마음을 평안케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의 길l이라고 했습니다. 늙으면 어린 아이가 된다는 말같이 작은 일에도 곡해를 잘 하고 섭섭해 하기 쉽습니다. 기력이 쇠하여지고 경제력이 없어져 자식에게 의지하여 살게 되면 낙조의 서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진수성찬으로 대접을 하여도 마음의 평안을 못 가지게 된다면 그 대접도 효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불신 부모를 구원의 기로 인도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 사회 개혁, 정의 구현, 개인 축복 등 이 지상의 제 문제 해결만을 위한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도 물론 해야 되겠지만 더욱 귀하게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에게 진정한 효성은 영혼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이 됩니다. 불신 부모님이 계시다면 그 영혼 구원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최대의 효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 부모님께 핍박받는 며느리가 흔히 하는 말은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다시 교회에 나오겠습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부모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적극적인 전도를 해야 합니다. 최선의 효성은 부모님 영혼 구원임을 믿고 기도하여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생전에 효도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야단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살아생전에 잘못해 드린 것을 지금이라도 효로 갚아 보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보다는 생전에 효도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효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여자 성도는 시집와서 안 믿는 시아버지께 13년간이나 날마다 극진한 효성으로 전도하여 드디어는 시아버지로 하여금 감동을 받아 교회에 나오게 하였다고 합니다. 옛말에 "나뭇가지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지 않고, 부모님께 효성을 하고자 하나 부모님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단 한 번의 기회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루 동안 열심히 믿지 않는 부모님께 전도하여 부모님들로 하여금 하루속히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자녀가 되는 것이 축복을 받는 자녀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육적인 효도뿐 아니라 영적 효도에 있어서도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영혼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 인한 기쁨이 넘치시도록 영혼에 유익을 드릴 수 있게 효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하나님을 더 잘 섬 기실 수 있도록 기도하고 위로해 드리고 물질도 드려야 합니다. 성도님들 부모님이 그 영혼에 상처받지 않으시도록 살펴드립시다. 내가 영적 생활에 전력하고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들도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배려하여 드립시다. 우리 성도님들 이런 효행이 우리 교회 안에 가득케 되면 우리 교회 모두가 믿음이 견고해지고 축복이 가득히 임하게 됩니다. 타인도 전도하여 영혼을 축복 받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면 어찌 내 부모를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부모의 영혼을 위하여 효도하는 효도는 모든 효도의 근본입니다. 부모에게 잘하면 형통의 복을 받는 다는 말씀으로 하늘 복을 받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6. 생명의 속전(贖錢) / 출 30:16

찬송 : 405장(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의 종 된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 해방의 기쁨을 소유한 백성들은 누구나 '생명의 속전'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속전을 요구하신 주님은 몇 가지 기준을 주셨는데 그 첫째는 만 20세 이상이 되는 사람은 누구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반 세겔의 속전입니다. 세겔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낮은 단위의 화폐입니다. 그러나 그 낮은 단위의 세겔의 절반을 내라고 하신 것은 부담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빈부에 관계없이 속전을 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부자라고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외가 없는 참여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죽으심이 죄의 결과나 혹은 그분의 허물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생명의 속전을 반 세겔씩 내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생명의 속전으로 보혈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반 세겔이 아닌 십자가로 주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생명의 속전이 되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죄악의 질고를 지고 여전히 고통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주님의 은혜를, 주님의 구원을 확인하고 그제야 비로소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이미 우리에게 죄악의 멍에를 끊어 해방의 은혜를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 구원의 사실을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시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명의 속전을 드려야 한다는 이 말씀에는 누구든지 예외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결단은 언제나 개별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는 부모의 후광이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드린 속전은 16절에 보면, 회막의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은 성전의 여러 부분에서 사용됩니다. 교회의 지상과제인 선교와 교육과 봉사와 친교를 위해서, 교역자들의 생활비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예물이 가장 먼저 써져야 할 곳은 회막입니다. 성전의 운영을 위한 지출의 근거를 분명히 해주신 이 말씀은, 예배의 원만한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헌신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헌신은 하지 않으면서 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설이 어떠니, 더운데 에어컨이 없느니, 추운데 온풍기가 없느니, 수양회에 가면 간식이 시원치 않으니" 하고 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용돈을 줄 때는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헌금할 때는 그보다 못한 정성을 드린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는 서로 돈을 내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에는 방관하는 사람에게 하늘 복이 임하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의무를 제대로 감당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절약을 원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이 없는 곳에는 모든 것이 넉넉해도 불평이나 원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회막에 봉사하는 일에 쓰임을 위해서 모든 백성들이 반세겔을 드리지만 그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의 피로 이 교회를 사시고 그 성도들을 만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주님이 세우셨기에 그 교회는 영원하고, 주님께서 피로 사셨기에 그 교회에 출입하는 모든 자들은 감사로서의 삶을 살게 된 줄 믿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족할 만한 향기로운 제사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만 다시 살렸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속전 되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이 교회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7. 지키면 삽니다.(레 18:4-5)

찬송 : 560장(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운동 경기를 할 때 선수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 규칙입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미리 출발하려고 출발 신호가 나지 전에 움직이면 실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부여하신 명령과 규례는 그 백성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신 30:11-14). 이 세상에서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땅에는 땅의 법이 있고, 하늘에는 하늘의 법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직분을 맡아 집사, 권사, 장로가 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킬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자손까지도 번창케 해 주십니다. 어떤 복을 주실까요?

 

1. 자손에게 배 푸시는 복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신 7:13a) 하나님께서는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창대케 하십니다. 자손의 복을 주신다는 것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자손의 수가 많아지고 번창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손이 성공하고 부요하고 건강하고 장수하는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자손이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해서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 풍성하게 베푸시는 물질의 복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신 7:13b) 하나님은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의 가정에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직장과 사업장에도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풍성케' 하시고, ‘번식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사를 하면 농사가 잘되게 하시고, 목축을 하면 목축이 잘되게 하십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같은 농작물을 풍족하게 하시고, 소와 양이 번식하게 하십니다. 정치도 성경 안에서, 사업도 성경 안에서, 직장 일도 성경 안에서, 우리의 인생도 성경 안에서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축복의 역사를 주십니다.

3. 뛰어나게 베푸시는 능력의 복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신 7:14)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는 인생에서 우승하게 되고, 자녀가 학교에서 우승하며, 회사도 우승하게 됩니다. 유대민족은 경제, 기술, 두뇌 등 많은 것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민족도 탁월하게 하시고, 개인도 우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민보다 우수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작은 성공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이지만, 큰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축복을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언제나 잘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법을 알게 해서 말씀대로 살게 하면 형통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자녀에게 가르치는 가정이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4. 건강을 베푸시는 행복의 복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급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신 7:15) 하나님께서는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에게서 모든 질병을 쫓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급사람이 10가지 재앙을 받을 때 당했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질'이란 악성 피부병, 장티푸스, 천연두, 안질, 흑사병과 같은 일종의 전염병입니다. 기독교는 건강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말씀은 치유의 약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고 말씀 안에서 치유되는 감격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규례대로 살아가는 우리를 구별해 주십니다. 구별함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룩함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구별하다’는 뜻의 어원에서 파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이라는 단어는 그 독특한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배타적으로 사용됩니다. 거룩이라는 개념은 항상 구별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럴지라도 이것은 훨씬 더 고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는 심령, 가정이 되어서 하늘 은혜가 넘치는 한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8. 축복 대선언(민 6:24-26)

찬송 : 310(아 하나님의 은혜로)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대 축복 선언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는 축도할 때 이렇게 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사장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내려 주신다는 약속이입니다. 제사장은 주님의 복을 위임받아서,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 주님의 이름에 의존하여 축복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복을 주시기에 제사장은,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복의 전령이요, 복의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무릎 꿇는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을 송축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축복할 때, 어린아이들을 가슴에 않고, 머리를 꼭 붙들어 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머리를 돌려, 축복하는 자의 손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말씀을 믿고, 축복하는 자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머리를 통해 축복해 주십니다. 포도주 잔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았는데,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맨 위로 올라가, 포도주를 부으면, 맨 위에 잔에 차고 넘쳐흐르게 되고, 그 다음 잔에 차고, 또 차면 그 밑에 잔으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렇게 차고 흘러 넘쳐는 복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축복 중에, 가장 짜임새 있고,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모두 미완료형인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그대로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축복은 어떤 복일까요?

 

1. 지키시기는 복

하나님의 축복은 언약의 자녀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은, 받은 복을 잘 간수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받느냐도 중요하지만, 받은 것을 잘 지키고, 효과적으로 활용함은 더 중요합니다. 악한 원수 마귀가 조금도 쉬지 않고, 우리 인생을 향해 공경해 올 때 울타리를 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도, 우리를 찾아내시고 주목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잠시도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철저하게 시켜주시는 복이 큼을 알아야 한다.

 

2. 은혜 베푸시는 복

다윗은 기도할 때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9-11) 라고 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님의 영광이 내게 비추고, 내 안에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은혜 베푼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난(ן󰗻󰖎)’이란 말입니다. 이는 본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상체를 굽힌다.’는 뜻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입니다.

 

3. 평강을 주시는 복

평안은 환란 중에서도 체험되는 평안입니다. 분명히 외적으로는 고통과 시험이 심한데, 영혼 깊은 곳에서는 평안함이 솟아나는 편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환희와 기쁨이 넘치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런 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복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 지혜, 물질, 건강, 자녀의 복 등을 포함하여, 현세와 내세의 모든 복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마11:12을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오셔서, 복 받기를 사모하여, 그 복을 받아 누리셔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복을 비는 마음입니다. 복을 빌어주는 마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요, 베풀어주는 마음이며, 사랑의 마음이기에, 복을 빌어주는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선한 마음입니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삭막해 지는 이유는, 남을 축복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와 축복을 받고,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성도들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9. 주님이 함께 하시면(민 23:19-20)

성경 : 325장(예수가 힘께 계시니)

 

오늘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양이 이리 가운데 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은밀하게 간교한 음모를 꾸미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고 해도 미혹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 이하를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다음 구절인 민수기 23장 21절 하반 절을 보면.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들 중에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1.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사야서 41장 10절을 기억하시지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3장 1절 이하를 보세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2.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떠나실 때가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3.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구주로 시인할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더구나 오순절에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때의 역사는 지나가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도하십니다. 그 심령을 소생시키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훈련시키시고, 사역하십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모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약속하신 것 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고, 그렇게 행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합니다. 가령 교회에는 중생해서 새 사람 된 분들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밀 가운데 가라지도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교회를 이끌게 되면, 그 교회는 생명력이 상실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벽돌집이나 석조건물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영혼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거듭나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 생명이 넘쳐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있으면 자연적으로 범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사업이나 국가 사회가 어지럽고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생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고통스러운 세상은 모두 다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다가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치적인 환난이고, 경제적인 환난입니다. 사회적인 문제요 국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 한 가지 영적인 문제밖에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현 우주와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하나님 명령 한마디에 갈릴리 풍파가 잠잠해진 것처럼,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 온 것처럼 순식간에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말씀을 통해서 생깁니다. 말씀을 사모하면서 그런 통 큰 믿음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0. 자비하신 하나님(신 4:31)

찬송 : 344장(믿음으로 가리라)

 

영국 선교 역사를 보면 “프레드릭 로버트슨”이라는 전설적인 선교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정과 맞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한 분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상점에 가서 로버트슨의 이야기를 꺼내자 상점 주인이 방에 데리고 가서 로버트슨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부정한 행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초상화를 바라봅니다.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 도저히 부정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소녀는 로버트슨의 상화에서 그의 자비스러운 눈과 잠깐 부딪친 후 눈물을 흘리며 더욱 선을 행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저 자비로운 분이 계시는데,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이에게 부모가 있다는 것은 큰 힘입니다. 어떤 위기가 있으면 무조건 엄마, 혹은 아빠를 찾습니다. 형제들이 많던 시절에는 형님부터 찾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에게는 부모나 형님이 자기를 이해해 주고, 자기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신뢰가 없다면 평생 사슴 속에 멍든 채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비하신 여호와임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책망과 심판보다는 자비와 사랑을 우선적으로 행하십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믿는 성도들입니다. 자비의 하나님은 비록 잘못이 있어도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용서하시는 것보다 더 큰 용서입니다.

 

1. 버리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

자녀가 못된 짓을 하고 도저히 고쳐지지 않으면 쓰라린 마음으로 자녀를 경찰에 고발하는 부모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도 자녀가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 면회를 가고, 음식을 먹게 하고 옷을 넣어 줍니다. 여전히 자녀의 마음이 돌려지고, 행동이 교정되기를 바랍니다. 부모의 이 모습은 자녀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돌이키기만 하면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역시 아집과 교만 그리고 불순종으로 인해 버림받을만한 일을 한 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버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는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더 순종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계획입니다.

 

2. 멸하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완전히 멸하라고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의 우상문화가 근절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신앙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이기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광야에서 위기를 당해도 이 약속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은 늘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잊고 살 때도 있습니다. 우리 계획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실패하면 완전히 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절망하며 목숨을 끊습니다. 그러나 한번 실패가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버리지도 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일어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멸망은 없습니다.

 

3. 언약을 잊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영원토록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으십니다. 언약을 번복하지도 않으십니다. 언약을 파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사람 편에서 언약을 잊는 경우는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왕 노릇하는 언약을 주셨습니다(계 22:5).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에 의한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이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벌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아직도 사랑으로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조상들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기억하라고 하시며 언약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자비와 사랑 그리고 축복의 언약을 가진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우리도 가정에서 자비의 손길로 서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작은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자비의 손길이 디는 갈음을 주님은 기억하시고 하늘 복으로 우리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21. 복을 유지하는 길(신 4:40)

찬송 : 347장(허락하신 새 땅에)

 

한 가난한 집의 다락방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동화를 쓰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곱 살 때 구두수선공인 아버지를 잃고 나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은 꿈과 비전으로 가득 차, 그 어떤 환경도 이 젊은이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비록 가난한 고학생이었지만, 어린이들에게 『꿈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 이처럼 누추한 다락방에서 주옥같은 동화들이 탄생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세계적인 동화 작가 안데르센입니다.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품었던 꿈이 이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지키기만 하면 나는 물론이지만, 후손들까지도 복을 받고 장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성경을 보면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말씀에 대한 감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마리아의 경우도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감동을 안겨 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도중 잠시 쉬어가는 시간에 마리아는 준비해 두었던 향유를 전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는 값으로 치면 600데나리온이나 되는 고가품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가장 절호의 기회에 바치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이 일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줄 알고 한 건 아닐 것입니다. 그저 순수한 뜻으로, 헌신의 마음으로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자기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며칠 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알고 보니까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이 순수한 헌신의 마음이나 순수한 뜻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께서 선한 결과로 연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구원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고 순종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차고 넘치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생겨난 민족이요, 또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은 민족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의의 칼날로만 심판하시기로 하셨다면 그들 중에 살아남아 있을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급에서도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사랑하셨고,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는 성도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은혜로 구원의 축복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으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약속을 믿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함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늘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말씀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를 행한 자에게 차고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기만 하면, 그들로 강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시고, 그 땅에서 장구히 살게 하실 뿐 아니라 특별한 보호와 풍성한 소출과 번영의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더욱 기쁜 마음으로 그 말씀을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늘 가나안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진정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때, 마치 운동 경기자가 마련된 상을 위하여 진력하듯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된 상급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축복까지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약속 받고 광야에서 연단 받은 것처럼, 이 세상 가운데서 신앙의 정절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한 번 받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계속 받고 받은 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받은 복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영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신 5:10)

찬송 : 285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직장인들이 출근하여 한 달 동안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나서 받는 것을 우리는 “월급”이라고 합니다. 또 육상 경기처럼 한 선수가 경쟁 상대와 실력을 겨뤄 이겨 상을 받으면 그것을 우승이라고 합니다. 오랜 기간 봉사를 했거나 귀한 일을 성취한 것이 정당하게 인정되어 받는 것도 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돈을 벌 능력도 상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우승한 사람이 받는 것과 같은 것을 받으면 우리는 그것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바로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였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감동하게하면 하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은 감동되셔서 우리에게 천대까지 이르는 축복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천대까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를 시험해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삼고 제사를 드리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아들을 더 사랑하는 지를 시험해 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창22: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네가 나를 백세에 난 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줄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바다의 모래와 같고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주시고 천대에 이르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백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기 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에 이르는 복을 받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천대에 이르는 복을 받습니다.

성경의 계명 전체를 둘로 나눈다면 위로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값없이 구원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의 후사가 되었으면서도 정성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늘가는 길은 정성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매일매일 우리의 정성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우리 옛말에도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정성이 지극하면 하나님도 감동하신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하나밖에 없는 가장 사랑하는 독자까지 드리는 믿음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크게 칭찬하시고 영육 간에 큰 복을 받고 온 인류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모든 생활에서 최우선 순위에 두고 가장 존귀히 여기는 것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God First”입니다. 사무엘상 2장 29절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라고 하시면서 제사장 엘리와 그 가정을 버리고 제사장 대가 끊어지게 했습니다.

 

2011년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기대하십니까? 그 복이 여러분의 자자손손에게 임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십시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이웃 사람들과 더불어 살 때에 주님의 이름이 찬양받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천대에 이르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마음을 품고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지켜 행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살아서 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크신 복이 2011년도를 맞이하는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히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 명령에 순종할 때 임하는 축복(신 5:33)

찬송 : 204장(주의 말씀 듣고서)

 

항구에 정박한 한 상선에서 선장의 아들이 원숭이와 어울려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소년의 모자를 낚아채 돛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소년은 모자를 빼앗기 위해 정신없이 원숭이를 뒤쫓았습니다. 소년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발 맡을 내려다본 소년은 겁에 질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은 공포에 몸을 떨며 밧줄을 잡은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선장이 돛대 위에서 울고 있는 아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밧줄을 놓고 빨리 바다로 뛰어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 소년은 두 눈을 감고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말만 믿고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물속에서 솟구쳐 올랐을 때는 아버지의 아늑한 품에 안겨 보트에 태워져 있었습니다. 신앙이란 세상의 밧줄을 놓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기만 하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1.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면,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면, 구약성경 39권의 말씀으로 약속을 주지 아니하셨다면,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어 드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다 행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의 구세주로, 우리의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대로 죽으시고, 그 뿐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오시고, 말씀대로 사시다가,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하시고, 지금도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응원하고 계신 것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성경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어야 복을 받습니다.

성경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입술만 가지고 "하나님, 사랑해요. 하나님 사랑해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깨달으려고 하지도 않고, 내가 전하려고 하지도 않고, 내가 실천하려고 하지도 아니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이건 새빨간 거짓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행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는 빼놓고 읽으면 안 됩니다. 또 행할 때도 내가 기분 좋은 것은 행하고, 기분 나쁜 것은 행하지 않고, 이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우리에게 쓴맛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단맛도 될 수가 있습니다. 신맛도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쩔 때는 아무 맛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또 듣고, 듣고, 행하고, 행하면, 하나님의 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3. 말씀대로 행하려는 믿음이 있어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고, 행하는 사람,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수와 형통의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시고,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전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로써 온 민족이 대대로 복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말씀으로 훈계하고, 말씀들을 그대로 지키게 만들어주어서 말씀의 전수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실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더 큰 자녀가 성경 말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한다면 그 부모는 영적인 교사로 파송된 직무를 유기한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부터라도 한 구절이라도 함께 외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 가서 영원한 천국에 가서, 참 본향에 가서 우리는 면류관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말씀을 지키며 수고한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딤후 4:8).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벧전 5:4). 이것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 정직한 영을 위한 하늘 축복(신 6:18-19)

찬송 : 224(정결한 물로 우리 죄를)

 

정직은 신용이고 신용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엇보다도 정직한 영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의 원인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세상만 보고, 세상만 신뢰하기 때문에 정직의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적당히 거짓을 행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정직은 “야샤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은, 똑바른, 올바른, 정당한' 등의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약 120회 나오는데요. 하나님께나(출 15:26, 신 12:25, 신 13:18, 왕상 11:33, 렘 34:15 등) 혹은 사람에게(신 12:8, 삿 17:6, 삼하 19:6, 렘 40:5, 잠 12:15 등) 옳거나 의로운 것, 그리고 하나님께나(신 32:4, 시 25:8, 시 92:16, 호 14:9, 느 9:13, 시 119:137, 시 33:4, 잠 8:9 등) 사람에게(전 7:29, 미 7:2, 욥 1:1, 욥 1:8, 욥 2:3, 시 37:37, 욥 8:6, 잠 29:27, 시 37:14, 대하 29:34 등) 올바른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서, 그리고 사람을 향해서 올바르며 진실하고 거리낌이 없는 것이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은 정직과 참 마음과 온전함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성도는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로 부끄러움을 당케 하기 위해서라도 정직한 삶, 거리낄 것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무슨 허물이나 약점이나 비방거리가 있는가?’를 살피는 악한 세력과 그런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당당한 것이 바로 성도가 가져야할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정직한 영에게 주시는 하늘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정직한 영이 됩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 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말씀은 순결한 마음, 깨끗한 영을 지닌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이 가장 인간다울 때가 언제냐 하면 순결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 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은총을 입으려면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맑고 깨끗하면 내 마음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내 생각, 내 판단, 내 생활은 모두 하나님으로 부터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처럼 “은혜가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면 내 마음 속에서는 빛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내 속은 “나”라고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본능적인 나”만 득실거릴 뿐입니다.

 

2. 말씀 안에 살아야 정직한 영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알아야 정직한 영이 될 수 있습니다. 읽되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길이 있고, 해답이 있고, 종말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인들을 보면 대부분 성경을 통해서 변화를 받았습니다. 위인들의 정신 속에는 성경이 주는 감화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데는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을 읽되 그냥 죽 읽어 가면 뜻이 없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느냐를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나의 환경에, 이 사회에, 오늘의 정치상황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느냐를 생각 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정직한 영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은총을 입으려면 꾸준한 신앙이 필요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 살게 될 때에는 즐거움이 유지되고, 영적인 조화가 이루어지고, 평안이 지속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살게 되면 태에서 떨어진 아이처럼 실존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고독함이 오고 영적인 고뇌함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없이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두려움 속에서 종말을 맞습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죽지 않으려고, 한 순간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이 겪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꾸준히 내리는 이슬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서 깨끗한 마음과 영을 지져 정직한 영에게 주시는 하늘 복이 충만한 기쁨을 아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5. 하늘 복의 초대장(신 7:11-12)

찬송 : 546장(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아프리카에 어느 작은 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 때 그 나라의 추장이 제일 먼저 빅토리아 여왕에게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은 “영국이 누리는 부와 문명을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였습니다. 그때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가방을 열어 책 한 권을 건네주면서 “이것이 우리 영국의 부와 문명을 가르쳐 준책입니다. 이 책을 보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축복을 보상으로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곳곳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명령하셨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풍성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지키면 그런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기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 속에 기준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이 곧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준이며, 기초입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듣는 말씀이 초청장입니다.

말씀은 우선 귀로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들려 주셨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귀로 듣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들은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억까지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귀로 듣는 말씀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이 말씀이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도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허망하게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겉으로 남고 속으로 밑지고 강을 건너면 산이 나오고, 산을 넘으면 강이 나오는 고난만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에는 뽕을 먹고살아야 하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살아야 합니다.

 

2. 지킬 말씀이 초청장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 말씀은 보존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사로이 해석하거나 혹은 아전인수로 받아들여도 안 됩니다. 사사로운 정욕이 말씀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말씀의 본래 뜻을 왜곡시킵니다. 말씀의 순수성이 훼손되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도 이상한 방법으로 받으려 합니다.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 말씀으로 들려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우리의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후손들을 향해 실수 없이 축복하시는 하나님, 언약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지식과 경험만을 내세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미련하게 보고,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깁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지식과 경험에 넘어 져서 사업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겠다고 굳게 다짐한 그것이 하늘 복의 초청장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행할 말씀이 초청장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복을 주시려고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실한 백성에게는 천 대까지라도 복을 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대대로 내려가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이 우리에게 향합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받는 복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리고 자녀들이 하나님의 베푸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그냥 지낼 수 있습니까? 말씀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선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인생이 평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에 힘서야 합니다. 언제나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을 지키기 위해 늘 노력하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사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더 큰 복을 주고 싶으셔서 노심초사하십니다. 말씀대로 살아 하늘 복의 초청장을 자신과 남을 위해서 활용하는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6. 하늘 축복의 징검다리(신 7:13)

찬송 : 292장(주 없이 살 수 없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속에 모든 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되고 모든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계시면 만사형통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를 가로막을 자도, 우리를 거스를 자도 없을 줄로 믿습니다. 성공한자와 실패한자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성공한 사람은 끊임없이 결단을 하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결단해야 될 때를 미루는 버릇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작은 것의 차이가 결국 인생을 성공자로 만들기도 하고, 실패자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깨달음을 주실 때, 내가 결단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복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는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되신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급보다도 큰 상급이요, 어떤 재산보다도 큰 재산입니다. 불안한 세상 속에서, 하루의 일도 알 수 없는 인생살이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고 복 받는 길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받은 복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징검다리가 된다는 것은 자자손손 기억되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은 또 다른 복을 주시기 위한 징검다리입니다. 세계적인 기근 때에 애급의 총리였던 요셉의 덕으로 요셉의 집안은 애급의 고센 땅에 거할 수 있었고, 거기서 번성하여 민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애급의 온갖 우상 숭배와 죄악의 관습을 따르는 바람에 애급의 노예 신세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애급의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은 뒤늦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애급에서 해방시켜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출애굽 사건은 선민인 이스라엘 역사상 하나님의 최대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얻는 징검다리로서의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복을 받아 누리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실 복의 내용보다 먼저 복을 받을 사람의 조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도 그냥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고, 또 적합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복을 받으면 오히려 화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필 깎는 칼이 초등학교 어린이에게는 복이지만, 어린 아기에게는 화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돈은 고매한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는 복이지만, 사치와 허영심에 들뜬 사람에게 는 화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 받을 준비를 하고 복을 누릴 조건을 갖추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을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고민을 많이 하실지도 모릅니다. 축복하기는 해야겠는데 받을 자격도 조건도 미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복을 받아 누릴 그릇이 되도록 우리를 연단하시고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스가랴 13:9에 보면,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제자들을 선택하시자마자 쓰신 것이 아니라, 신앙 인격과 영력을 갖추도록 신령한 말씀과 기도로 열심히 제자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시련과 고난을 하나님의 축복의 방편으로 받아들이고 말씀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복은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골고루 복을 주시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이나 영적인 면에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우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다 골고루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아야 하고, 또 그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복을 받는 길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받은 복을 누리는 길은 의와 진리와 사랑의 말씀을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계속해서 새로운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7. 영혼의 양식(신 8:3)

찬송 : 289장(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이 있다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이 최초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세상을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하신 그 마음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보물을 저장하고 있는 축복의 창고입니다. 마음에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공실패가 좌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여러 가지 부류로 비유한 말이 있습니다. 크리스천 중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물고기와 같은 교인(Fish christian)이 있고, 둘째는 새 같은(Bird christian)교인이 있고, 셋째는 개 같은(Dog christian)교인이 있고, 넷째는 거북이 같은(Turtle christian)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물고기 교인이라 함은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항상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형통의 복이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과 자기와의 관계를 절대적 관계로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같은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굶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새는 9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9일 동안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주일에 한 번만 교회에 나오는 교인을 이름하여 새 같은 교인이라고 한답니다.

개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개는 굶어도 20일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의 교인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교회에 나오는 선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북이 같은 교인도 있습니다. 3개월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동물이 거북이입니다. 일 년에 몇 번만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 얌체 같은 성도가 바로 거북이 교인입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먹어야 할 때 먹고살아야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루에 세끼는 먹도록 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면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일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루에 두 끼나, 한 끼를 먹으면서 산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분들은 정상적으로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상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정상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도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타락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됩니다. 마음이 둔하여 영적으로 굶주리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타락을 하게 되는 것은 영적인 양식을 무시하고 육신의 양식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말씀을 받는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옥토와 같은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창 1:1절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였는데 이 능력은 말씀입니다. 요1:1절에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중풍 병으로 고난을 당하던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 말씀대로 그 환자는 중풍 병에서 놓여서 자신이 누었던 자리를 들고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모든 병자들을 고치실 때 이와 같이 말씀을 명하시니 모든 병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말씀이 없는 탓입니다. 말씀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리시며, 구원하시고, 성공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광야의 세월을 통과하여 오는 동안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더워서 견딜 수 없고, 밤에는 추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아니면 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에게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까지 주셨는데 그것이 만나입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고 마시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날마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열심히 듣고 읽고 보아서 믿음이 자라 그 믿음으로 승리하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8.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축복(신 11:14)

찬송 : 304장(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사람보다는 사람을 섬기고 지식을 섬기고, 물질을 섬기고, 명예를 섬기고, 권력을 섬기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실상은 무엇인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다못해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라도 합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넘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올바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축복받는 삶,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 행하며 가나안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이 왜 축복의 땅입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가나안 땅이 축복의 땅인 이유는 그 땅과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항상 돌보아 주시고, 그 눈이 항상 그 땅과 그 사람들을 살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우리의 삶과 가정이 진정한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늘 복이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내려 주시는 복이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축복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늘에서 내려오는 축복을 저장하고 살아야 합니다.

애급 땅에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물을 얻었습니다. 힘들게 물을 밭에 길어 놓아도 그 물은 땅으로 스며들거나 흘러내려갑니다. 그러면 또 수고롭게 그것을 채워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은 사람의 수고로 몸부림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을 삽니다. 또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 하늘에서부터 내리는 비를 가두어 놓고 저축합니다. 물을 흡수하는 땅인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일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마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넉넉한 축복을 우리 마음속에, 우리 가정에 , 우리가 경영하는 기업 가운데 머물게 해야 합니다. 충만하게 저축하고 항상 말씀이 넘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고 맞고 살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아무리 산과 골짜기가 있어 물을 가두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1달, 반년, 1년……. 아마 몇 달이 지나면 그것이 모두 바닥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젊은 날에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만으로 노년까지는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젊었을 때 받는 축복이 있고, 나이가 들어서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은혜를 한 번 받고 언제까지 그냥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삶에는 순간순간 필요한 축복과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 곡식과 포도주의 기름을 얻을 것이요.”

이스라엘 땅에서는 두 차례의 큰 비가 내립니다. 처음에는 10-11월 정도의 추수기간에 내리는 비입니다. 이 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름 가뭄을 해갈하고 곡식을 거둡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른 비가 지나간 후에 비가 오지 않는 기간이 계속됩니다. 땅은 건조해지고, 먹을 양식은 떨어집니다. 그러면 3-4월에 늦은 비가 내립니다. 이 비는 이른 비와는 달리 더 많은 양의 비가 내립니다. 마치 폭풍우처럼 비를 내립니다. 그 비로 인해 가뭄이 해소되고, 밭에 풀이 나서 가축들이 그 풀을 먹고, 그 비로 인해 보리를 심어 거두어 먹고, 다시금 농작물을 심게 됩니다.

만약 가나안 땅에 이른 비만 있고, 늦은 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한 우리들의 삶에 젊은 시절의 축복만 있고, 나이가 들어서 축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이 오래 전에 성령의 은혜를 받고 지금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축복은 그 순간에 맞게 축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순간순간 은혜를 주십니다.

필요할 때 비도 구하시고 태양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한 곳에는 비를 주시고 똑같은 시간에 다른 곳은 비를 주시지 않을 수 있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며 주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확신되는 일이라면 비든 눈이든 태양이든 열심히 구하십시오. “막연하게 기도하면 막연하게 응답하시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구체적으로 응답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응답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임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새벽에도 주일에도 수요 예배에도 철야 예배에서도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주시는 하늘 은혜를 받아 풍성한 영적인 소출을 얻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9.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신 11:27)

찬송 : 426장(이 죄인을 완전케 하옵소서)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브라함 링컨은 그의 나이 열 살 때 어머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주 가난한 살림살이에 작은 통나무집에서 살았던 에브라함 링컨입니다. 그의 어머니 낸시 여사는 말라리아라고 하는 병에 걸렸고 그는 곧 자기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끼면서 베개 머리에 열두 살 난 사라라고 하는 딸과 열 살 난 에브라함 링컨을 불러놓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링컨, 너는 앞으로 하나님을 잘 믿어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어머니의 부탁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라. 아버지를 잘 도와드리고 누나와 사이좋게 지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 그리고 1818년 10월 5일 35세의 나이로 낸시여사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에 에브라함 링컨은 어머님이 세상 떠날 때에 준 말씀을 늘 마음에 깊이 새기고 정말 여호와를 경외하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늘 기도하면서 살았고 결국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길이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2011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입니다. 이 말씀에는 하늘의 복을 받는 비밀이 있습니다. 핵심 단어인 ‘들으면’ 이란 말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말 그대로 잘 들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우선, 우선 잘 들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태도는 바로 주위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잘 들을 때, 그 속에서 믿음이 자라납니다. 역사적인 부흥의 현장에는 언제나 말씀의 터치가 있었습니다. 부흥은 인간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역사할 때, 그 말씀이 듣는 이들의 가슴에 엄청난 은혜로 임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잘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잘 들음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영적각성과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잘 듣고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주의 깊게 잘 듣는다는 것과 더불어 그 듣는 말씀을 깨닫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들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이 자신들을 구원하려는 것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자신들을 대적하는 소리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축복이 임하였지만, 오해한 사람들에게는 살인자의 저주가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적깨달음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 아름다운 영적 열매를 맺는 거룩한 성도가 되겠다는 결심을 실천하는 한 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3. 잘 듣고 깨달아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잘 듣는 것만큼, 그리고 그 들은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깨달아 알게 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듣지 못해서도 아니고, 깨닫지 못해서도 아니고, 사실은 듣고 깨달은 바로 삶 속에 적용하고 살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신앙이 삶으로 승화되지 못할 때, 그 신앙은 앉은뱅이 신앙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한 율법선생의 도전이 있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오만과 어리석음에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는 말씀 한 마디로 대응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역설했습니다. 순종이 없는 제사,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 그것은 수십 년을 교회를 다녀도 변화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그 자체가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순종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행함이 없는 미성숙함을 벗고,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0. 드린 손에 얹히는 하늘 축복(신 14:29)

찬송 : 197장(은혜가 풍성한 하나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소유를 위해 영원을 버리는 사람과, 영원을 위해 소유를 버리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영원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을 소유하기에 전 생을 거는 사람이고, 후자는 영원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한 젊은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 젊은 청년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재산도 가질 만큼 가진 부자였고, 지위도, 명성도, 차지하고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것으로는, 그이 마음 한구석 텅 빈 곳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텅 빈 빈곳을 채울 수 있는 곳은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청년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 너무 많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마 19:16-22)

이 청년은 가지고 있는 재물, 그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해서 영원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즉 이 청년은 영원을 버리고 세상의 보이는 물질을 소유하기에 전생을 건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 청년은 이 세상 재산 때문에 영원을 버린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청년과는 다른 사람, 영원을 위해 자신의 소유 전체를 버린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서 유익했던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으며, 예수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7-9)

이 세상에는 4 종류의 손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손, 제자들의 손, 아이의 손, 어머니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손입니다. 이 땅위에 예수님의 손이 없다면, 하늘 아버지의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중보자 예수님의 손에 얹어진 미약한 것이 놀라운 능력, 기적, 축복으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능력이 나타났고, 기적이 일어났고, 축복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손이 없다면 축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하나님을 향할 때에 기적은 일어납니다. 오늘도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주신다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의심 말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항상 기적, 축복, 치료,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통하여 축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제자의 손도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니 무리에게 나눠 주니라” 했습니다. 제자들의 손은 기적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지만, 만들어진 기적을 전달하는 역할은 했습니다. 만 명이 되는 사람들, 넓은 평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직접 갖다 주기 불편한 환경에서, 제자들은 큰일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손을 통해 떡이 전달될 때에 제자들이 은혜를 받고, 또한 무리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적의 축복을 나눠 주는 손, 교사의 손, 봉사의 손, 심방의 손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눠 주는 사람이 없으면, 위대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통로가 없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오지를 못합니다. 토마스 목사의 손으로 전달된 성경으로 한국이 살아나게 했습니다. 우리도 제자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의 손도 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요 6:9) 보리떡 물고기는 적고, 보잘것없지만 예수님께 드린 손입니다. 이 초라한 빵이 없었더라면 기적은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적은 빈손으로 행하지 않으니, 우리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부족해도 가져오라. 내가 기적을 일으키리라 합니다. 사렙 땅에 사는 과부에게 네가 살고 싶고, 풍년을 원한다면, 너 입에 먼저 먹지 말고, 내게로 가져 오너라, 너 축복받고 싶으면 내게로 먼저 가져오라, 죽고 싶다면 듣지 아니해도 된다. 드릴 때에 하나님은 비로소 일을 시작했습니다.(왕상17:13-14) 3년6개월 흉년에서 풍년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손도 있습니다. 아이가 배고파할까봐 도시락을 쌓아준 보이지 아니한 어머니의 손입니다. 도시락을 싸 주신 어머니의 손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손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했으나, 배후에 숨어서 일하는 손, 칭찬 대우도 받지 아니하고, 일하는 숨은 손입니다.

 

예수님은 한 과부가 손수 자기 손으로 드린 헌금은 기뻐하셨습니다. 그녀는 드린 헌금은 당장 하루끼니를 위해 필요한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부의 헌금행위는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입니다. 당장 먹을 양식을 위한 생활비 전부를 바쳤기 때문에, 생명을 드린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바쳐 살아야 합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2011년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31. 약속의 수혜자는 바로 나인 것을(신 15:4-5)

찬송 : 433장(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가스펠 헤럴드지에 게재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세실 씨는 어느 날 그의 사랑하는 어린 딸의 방으로 갔습니다. 딸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준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아버지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구슬이 아주 예쁘다고 감탄을 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얘야, 그것을 불속에 던져버려라.” 어린 소녀는 잠시 당황하고 망설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계속 말하는 것입니다. “네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너에게 맡기겠다. 이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나를 믿는다면 그렇게 해라.” 어린 소녀는 고심을 하다가 결국 순종하기를 택하고 그 상자를 불속에 던졌습니다. 그일 후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가 오랫동안 갖고 싶어 하던 훨씬 더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단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네가 이유를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릴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그때 네가 나를 믿었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언제나 그것이 최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의 못된 심성은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싫어합니다. 곁길로 나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른 길을 어쩐지 어색해 하고, 옳은 것을 귀찮게 여깁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싶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타락하고 싶은 욕망도 가집니다. 이런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과 가족들을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에 순종할 것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조하십니다. 동시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복 주심의 약속은 우리가 즐겁게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복을 받을 사람은 복된 말씀을 잔소리가 아닌 은혜로 듣습니다. 어떻게 받아 복의 수혜로 살아가야 할까요?

 

1. 오늘날 행하라

하나님은 제대로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억지는 복종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복종시키실 수 있지만 그보다는 자발적인 순종을 더 좋아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도 자발적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하기 싫어하는 일은 뒤로 미룹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는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에도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오늘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일입니다. 복 받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정녕 받으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시마고 여러 차례 약속하십니다. 자주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기억하고 새겨야 할 일입니다. 확실하다는 것을 보장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성경 여러 곳에 셀 수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만 펼치면 얼마든지 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현재의 축복이며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된 것이 복입니다. 이 복이 장래를 보장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장래를 지키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는 결코 변하지 않는 약속입니다. 정녕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미래는 축복의 길이며, 축복의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3.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능력의 차이는 빈부격차를 만들어냅니다. 정치는 이러한 빈부격차를 최소화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가들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평등함을 이루시는 축복입니다. 이 약속한 영원한 천국에서 완성됩니다. 천국은 욕심을 부릴 수도 없는 곳, 부족한 곳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슬픔과 걱정,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계 21:4). 무한한 영광과 감사의 찬송이 있는 곳,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계 19:7).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이 약속된 것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천국이 약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받는 비결은 너무나 쉽습니다. 너무나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홀히 여기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주시는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난을 모르는 삶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수혜자가 바로 나라는 믿음으로 사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2. 하나님의 성민에게 주신 축복(신 26:18-19)

찬송 : 401장(주의 곁에 있을 때)

 

똑같은 물이 반 컵 남아있는데 어떤 사람은 “아직도 반 컵이나 남아있네?” 하고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겨우 반 컵밖에 안 남았네?” 하고 불평한다고 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좋은 이유, 되는 이유를 찾는 사람과 싫은 이유, 안 되는 이유만 찾는 사람은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열 가지, 스무 가지를 찾아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내가 죽어야 할 이유, 내가 살 가치가 없는 이유를 찾아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결국 살고 죽는 것조차 우리가 셈을 어떻게 하느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출애굽을 하게 하시고 홍해도 갈라서 건너게 하시고 또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키시고, 40년 동안 만나로 메추라기로 먹여주시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받을 복을 상상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민이 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민에게 주시는 하늘 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누구나 복을 받기 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복을 실제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 받기를 바란다고 무조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참된 복을 주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복 줄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복을 줄 생각도 안 하는데 복 받고 싶어 한다고 무조건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탁월함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탁월한 사람으로 만드셔서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사람 위에 세우신다는 약속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또 하나의 복은 ‘번영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잘 살게 하시고 물질과 자녀의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내리사 약속한 땅을 주시고 우리의 자녀와 소유가 많아지는 복을 주시고 나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때를 따라 비를 내리듯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고 약속합니다.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주고 베푸는 사람이 되지 결코 남에게 꾸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우리뿐 아니라 우리 가정과 자녀, 자손들에게 번영과 풍성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있습니다. ‘보호의 복’입니다. 나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이 한 길로 나를 치러 왔다가 일곱 길로 패하여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대적이나 원수도, 그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도 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도록 나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지켜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나 어떤 고통이나 실패도 결코 여러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녀 된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을 누리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 약속된 복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공짜로 복 받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신명기 28장에 약속하신 놀라운 복에도 당연히 조건이 있습니다. 복 받을 자격, 복 받을 짓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오직 순종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오직 그 말씀을 따라 그대로 살며 순종하는 길뿐입니다. 찬송가에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고 했습니다. ‘받을 복’이 아니라 ‘받은 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받을 복만 감사하지 말고 이미 받은 복을 찾아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복, 지금까지 누린 복을 찾아 세면서 감사할 줄 아는 성도에게만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2011년에는 무엇보다 복을 세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이미 받은 복을 세며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받을 복을 세어보고 그대로 주실 줄 믿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100퍼센트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성민된 우리에게 모든 놀라운 복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다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 가정의 것이 되고, 우리 가문의 것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33. 하나님이 주실 큰 복(신 28:1)

찬송 : 213장(나의 생명 드리니)

 

세계 어느 나라든지 자기 나라가 강하기를 바랍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자기 민족이 우수하기를 바랍니다. 백인들은 자기들이 우수하다고 여기고, 유색인종을 멸시하거나 탄압한 적이 있었습니다. 게르만 민족이 자기들의 우수성을 입증하고자 전쟁의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혈통이 우수하다고 뛰어난 민족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사람의 기준에 의해서입니다. 사람은 지식과 기능을 토대로 문화와 군사력 등에 따라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가와 그 말씀을 얼마나 잘 듣고 순종하느냐에 따라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뛰어난 주의 백성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고, 축복은 조건부입니다. “만약 너희가 ~하면 내가 ~해주겠다.”는 조건부입니다. 어떤 조건을 채우면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으로 성공하는 비결은 지능 지식 기술 태도 네 가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능도 기술도 아니요.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세가 좋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듣는 자세, 예배하는 자세, 기도하는 자세, 말씀 듣는 자세,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하는 자세, 거기에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듣고, 신중하게 잘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 듣는 귀, 듣는 자세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듣는 말씀은 예배시간입니다. 예배시간에 예배드리는 마음 자세가 복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기쁨으로 예배에 와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이번만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예배에 참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기왕 예배에 왔다면 몸만이 아니라 마음자세도 바르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세로 예배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순종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이 나에게 있습니다.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듣습니다. 몸으로 듣는 것이 곧 순종입니다. 귀로 듣는 말씀은 머리만 이해시킵니다. 마음으로 듣는 말씀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몸으로 순종하는데 우리 몸에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채워져 있고, 그 말씀이 우리 몸을 순종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히 드린 것으로 보십니다. 완전히 드린 백성이 곧 뛰어난 백성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가라" 할 때 떠났습니다. 가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하였는데 그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너무 변론하고 따지지 말고 순종하면 됩니다. 꾀를 부리지 말고 정직하게 때로는 우직하게 때로는 고집스럽게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그것이 복된 자가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된 자가 되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순종의 조항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무의미하게 말씀의 조항을 따져가며 순종한다면 그 순종은 기계적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분명한 의식을 가진 순종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발적인 순종이요, 자세히 살펴 조금이라도 더 순종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니고, 생명체이므로 이러한 영적 생활이 가능합니다. “지킨다.”는 말은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예수님을 따르고 새 계명(요 13:34)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만한 믿음의 백성입니다.

이렇게 만 실천하면 우리를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뛰어난 운동선수나 배우들이 기자들의 취재거리입니다. 하늘나라의 기자가 있다면 누구를 취재하겠습니까?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뛰어난 믿음의 사람을 찾아 하나님께 보고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이 일을 해 주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롬 8:34).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는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사람들입니다(엡 1:21). 올 해 2011년에는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4. 나가도 복이고 들어와도 복이로다.(신 28:2, 6)

찬송 : 288장(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안에 있을 때도 형통의 복을 받고 밖에 나갔을 때에도 복을 받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런 복을 세상은 줄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는 분만 그런 복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전지전능하심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가도 복이요 들어와도 복이 되는 신령한 복은 과연 어떤 복일까요?

 

1. 신령한 복은 하늘에 속한 복이다.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복은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신령한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요삼 2). 영혼이 잘됨이 최우선입니다. 범사가 잘 되는 것은 차선입니다. “신령한”이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티케”입니다. “영적인”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복이 물질적이며 임시적인데 비해 신약의 복은 영적입니다. 세상의 복은 물질적인데 비해 하늘의 복은 신령합니다. 세상의 복이 임시적인데 비해 하늘의 복은 영원합니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들을 남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다녀간 후에 “저 사람 다녀가면 재수 없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전달하고 남깁시다. 이 복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하늘의 복입니다.

 

2. 신령한 복은 창세전에 예정한 복입니다.

하늘의 복은 미리 예정되어 있는 복입니다. 우연히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우연히 택정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자녀가 되고, 우연히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미리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복을 주시려고 쌓아두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복은 창세전에 이미 예비하신 복입니다. 우리가 요청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하나만 해도 창고가 넘치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씀을 다 순종하면 감당 못할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시기적으로 창세전에 삼위의 영화로운 교제가 있을 때 예정된 것입니다. 창세전에 속죄의 언약도 이루어집니다. 창세전에 예정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예정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리 계획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신령한 복은 하늘에 속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양자가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만 되어도 횡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5에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합니다. 양자의 영만 받아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가집니다. 바울은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여 이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자는 증인을 통하여 가족이 되고 아들과 같은 권리와 의무 가집니다. 누가 증인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가 증인입니다. 증인이 확실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확실한 증인입니다. 증인은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합니다. 선서할 때 손을 들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진실을 말할 것을 선서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아들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목사님은 피해자였습니다. 어느 날 법정에서 목사님을 법정에 나오게 하였습니다. 법정에 나가보니 가해자가 증인을 한 사람 데리고 나와서 목사님이 가해자라고 우겼습니다. 목사님은 혼자 나갔는데 상대방이 증인 한 사람을 만들어 나온 것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그 증인이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할 말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나는 미국의 양심을 믿습니다. 미국은 개인의 양심이 살아야 미국이 산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미국의 돈에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신뢰한다.’고 씌어져 있는데 이대로 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가짜 증인은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였고 목사님은 그 후에 보상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땅에 것에서 이탈이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적 복보다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복인 평안을 소유하고, 천국을 소유한 자답게 큰 가슴을 활짝 열고 위풍당당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5. 주고 또 주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신 28:13-14)

찬송 : 48장(거룩하신 주 하나님)

 

한 미술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린 그림 중에 가장 내놓을 만한 그림은 어떤 그림입니까?”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다음에 그릴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주실 하나님의 복은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 보지 못한 놀라운 복을 예비하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주신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것을 준비하십니다. 주고 또 주시어서 우리가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에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로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기 자녀가 다른 사람의 자녀보다 잘 되기를 바라며 기릅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 있을지언정 아래에 있지 아니하기를 바라며 정성을 다하여 기릅니다. 우리의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놀란 것이 있습니다. 달팽이가 자기 속에 알을 깝니다. 그 곳에서 달팽이 새끼가 태어납니다, 달팽이 새끼는 어머니 살점을 파먹으면서 자랍니다. 어머니 달팽이를 다 먹고 나오면 성장한 달팽이가 됩니다. 어머니 달팽이는 자식에게 자기 몸을 줍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이 정도로 희생하면서 자식이 잘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면서도 자기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위에 있을지라도 아래 있지 않기를 원하고 계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 있고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모세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좌로나 우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구름기둥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모두를 맡겼습니다. 아무리 살기 좋은 오아시스라도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떠나야 했습니다. 아무리 바란 광야가 살기 어려워도 구름기둥이 그대로 있으면 그대로 살았습니다. 모세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며,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셨습니다.

 

3.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여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여 주시는 것이지 인간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시면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질투하시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신이 무엇입니까? 석가모니가 다른 신입니다. 조상신이 다른 신입니다. 큰 나무나 바위가 다른 신입니다. 점을 치는 것도 다른 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절대로 이런 신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다른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다른 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다른 신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입니다. 세상 끝날 때가 되면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시대가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명예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 아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대들며 지키지 않았습니다. 명예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사람입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3년을 그렇게 따라다니며 섬겼던 예수님을 은 30냥 때문에 팔아 버렸습니다. 돈만 주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믿음이지만,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왕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에서 조금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하늘 복을 주고 또 주어서라도 거룩한 백성의 모습으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오는 것을 원하신다는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6.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9-10)

찬송 : 455장(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 앞에는 두 갈레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복의 길이요, 또 하나는 사망과 저주의 길입니다. 생명과 복의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길로서 번성과 복 주심의 길이요. 사망과 저주의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반드시 망하는 길입니다. 인간은 누구이든 막론하고 생명과 복의 길을 택하든지 사망과 저주의 길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선을 택하든지, 악을 택하든지, 복을 택하든지, 화를 택하든지 자기의 의지에 맡기십니다. 우리가 선택하여 가는 길이 복된 길인지 저주받을 길인지는 임의로 택할 수는 없으나 자유 의지의 마지막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옳고 의롭고 선한 길을 택하면 삶과 복이지만, 불의하고 악한 길을 택한 자의 마지막은 저주와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 걷는 길이 어느 길인가가 중요합니다. 복 받을 길을 걷고 있습니까? 복되지 못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까? 진실로 둘 중에 한 길을 바로 택하여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살게 하신 에덴동산에는 두 가지의 과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명과로 이 생명 과실만 먹으면 삶과 복이요, 또 하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인데 이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사망과 화의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고만 마귀의 꼬임을 받아 생명과를 택하지 않고 하필이면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선악과를 택하여 취함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원죄를 짓고 멸망을 받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지옥의 형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생명나무인가? 선악과나무인가? 하는 것은 자유 의지로 택하게 하였지마는 선택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지옥 가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밤하늘에 떠 있는 꼭 같은 달을 쳐다보면서도 사람의 생각 여하에 따라 아름답고 좋게만 보여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슬프고 비웃는 달로 보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파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온통 사물이 파랗게만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고 보면 또한 모두가 빨갛게 보이듯이 우리의 생각이 진정 의욕적이고 소망적이며 신앙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복 받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불평불만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되면 불행하고 못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힘 있게 떠오르는 태양 빛을 보면서도 "아이고 해가 또 떴네? 아이고 지겨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무슨 성공이나 희망이 있겠습니까? 적어도 아침 햇살을 보며 "야!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야 복 받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이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롬8:6-7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떠한 생각의 지배를 받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결정 나고 행, 불행도 결정 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곧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생활은 천국 생활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지옥 생활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운 생각만 가지고 살므로 말미암아 괴로운 세상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모신 천국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한 청년이 군대를 마치고 돌아왔으나 직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이 생각다 못하여 큰 회사 사장을 찾아가 "사장님, 나에게는 강한 체력과 고동치는 맥박이 뜁니다. 나에게 어떤 일을 시켜도 할 것이니 일은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말했습니다. 사장은 그 용기와 의욕은 마음에 들었으나 "그랬으면 좋겠으나 당장에는 자리가 없으니 이력서나 두고 기다려 보게나!" 했으나 이 청년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정말 그러는가? 그러면 이리 오게나, 여기 이 벽돌들을 저쪽 마당으로 옮겨 쌓겠나" "네! 알았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종일 다 옮겨 쌓았습니다. 그 다음날 나갔더니 사장은 말하기를 어제 옮겼던 벽돌을 다시 제자리로 옮겨 쌓으라고 합니다. 아마 웬만한 사람 같으면 "여보시오 사람 놀리는 것입니까? 하고 그만 두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하라는 대로 무조건 순종하며 의욕적으로 부지런히 했더니만 사장의 마음에 흡족하여 특채되어 정식으로 출근하는 직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올 해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말씀을 따라 항상 “네게 복 주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을 듣고 사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7. 선택과 책임의 자유(신 30:20)

찬송 : 370장(주 안에 있는 나에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신11:26의 말씀은 세겜에서 준 새 계약 축복과 저주의 내용과 비교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숙한 결정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면 땅에서 오래 살고 많은 번식과 함께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돌이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예배하고 섬기면, 저주받아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던 과거의 습관과 새로이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요구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그들에게 주어질 약속의 땅과 축복의 완성 후에도 유효했으며, 그것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선, 그리고 죽음과 악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규례를 잘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축복이 되고, 유혹에 빠져 다른 신들을 섬기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택과 책임감 수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에 해답을 제시합니다.

 

1. 율법을 준수하는 선택의 자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율법을 패하려 하심이 아니요 완성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의 모든 성격을 띠고 인간에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안전하게 하거나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일부는 받아들이고 또 일부는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의 선택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모든 일에 화해해야 하는 선택의 자유.

마음속에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 판단이 흐려지게 됩니다. 사사건건 미운 행동만 눈에 보이고 결국에는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는 남을 미워하는 죄를 짓고 그저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미움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해해야 합니다. 용서받은 그 마음으로 화해를 선택하는 성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3.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선택의 자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고, 팔이 죄를 지으면 팔을 잘라서라도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값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또다시 죄를 짓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선택으로 죄를 멀리하는 선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4.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선택의 자유.

슬프게도 현대인들은 거짓말을 생활의 편리한 도구로 습관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한 번만 잘하게 되면 일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상습적으로 거리낌 없이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들키면 죄요 들키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감수하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거절하면서 정의롭게 사는 선택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원수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 선택중 하나는 생명과 복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사망과 화의 길입니다. 즉 하나는 축복의 길이고, 하나는 저주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길을 두시고 선택할 기회를 우리게 주신 것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모두 축복의 길을 선택하실 줄로 믿습니다. 저주의 길을 선택할 사람은 여기에 없을 줄로 믿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선택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우리가 축복의 길을 바로 선택 한 그 자체는 생명이며 복입니다. 이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선택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러면 우리는 생명이 길어지는 장수의 복을 누리고, 하나님께 예비하신 아름다운 터에서 사는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복의 수혜자로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38. 너와 함께 행하실 하나님(신 31:6)

찬송 : 516장(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얼마나 신나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의미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분명 좋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게 채워준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것은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는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들은 알게 모르게 영적 싸움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마귀는 자기 영역을 확대하려고 신앙인들의 믿음을 깨뜨리려 합니다. 유혹하기도 하고, 핍박을 가하기도 합니다. 좌절하게 하거나 절망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의심과 불신, 회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마지막 순간 가나안의 백성들이 장대하고 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에 무기도 출중하다는 것도 정탐꾼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신앙을 경계하시면서 내가 함께 하리라고 하시면서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승리가 함께 합니다. 승리는 언제나 나의 것이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마음을 단단히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이미 지고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하고,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다짐을 해도 될지 모르는 세상에서 마음이 약하면 될 것도 안 됩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여 약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이 공격을 막아주십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기게 하십니다(약 4:7).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비록 가나안 백성들이 강하다고 하여도 두렵지 않습니다. 떨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움이 아닌 능력입니다.

 

2.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구하신 후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순히 말씀만 하시고 모른 척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위험한 지경에서도 부모님이 손을 잡아주면 안심하듯 하나님이 우리 손을 잡아 주시니 우리도 안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임마누엘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단단하게 합니다. 두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을 가집니다. 오늘 우리에게 임마누엘 신앙을 가지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마 1:23). 믿음을 가진 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3.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은 영원토록 함께 계셔 주십니다. 우리가 괴로움과 핍박, 혹은 시험을 당한다고 떠나시지 않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한다고 외면하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한 번 선택하신 것을 끝까지 고수하십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을 결코 저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무서울 때는 힘없는 동생이 함께 해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곁에만 계셔도 우리는 안심입니다. 곁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여 주십니다(시 17:8).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계십니다. 내 곁에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2011년에는 두려움을 없애시기 바랍니다. 담대하게 나아갈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나가게 하지 않는 한 언제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만 가지면 그 믿음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고, 나의 힘이 되십니다. 그렇게 형통의 승리자가 되는 2011년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9. 영원히 사는 복(신 32:39-40)

찬송 : 469장(내 주 하나님)

 

성도는 구주를 연접한 후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성실한 믿음과 착한 성품 행동을 가진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도 성실한 믿음은 존재하고 착한 성품과 행동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가지고 신자라고 주장하거나 진리의 모습으로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삶과 죽음을 그리스도께 맡긴 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고 죽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아직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고, 죽는다면 내가 해야 할 사명이 다 완료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좋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바라보며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영원한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히 삽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죄가 크고 허물이 많아 감히 하나님 앞에 나올 수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롬 3:23)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자를 구원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도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므로 (빌 2:6)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십니다(마28:20).

 

2. 예수님을 사랑해야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려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물과 기름은 절대 함께 섞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반대인 미움 분노 질투 악한일 등이 있는 곳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길 원한다면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빚을 갚고 하나님과 함께 하길 원한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웃과 형제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충만한 곳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십니다. 성령의 열매중 제일 먼저가 사랑입니다(갈 5:22-23). 사랑은 중요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심령, 가정, 기업체, 사회가 되려면 오직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RP 하시기 때문입니다.

 

3. 회개하는 영혼이 영원히 삽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예수님께서 복음전파의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였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곳이므로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토록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진실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4. 예배하는 영혼이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은 예배장소, 예배드리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요 4:23). 하나님은 예배의 장소에 함께 하십니다(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그래서 하나님께 제사 드린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창 15:9-), 홍수이후 단을 세워 하나님께 제사 드린 노아에게 축복하셨으며(창 8:20-), 솔로몬이 성전을 세워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습니다(왕상 3:1-)

이렇게 살기만 하면 우리의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땅에 살면서도 하늘 백성으로 이미 영원한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하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바로 사랑하는 가족이 먼저 하나 되어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한 주간에 한 번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믿음을 보여주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0. 사랑을 입은 사람(신 33:12)

찬송 : 615장(그 큰일을 행하신)

 

매우 가난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책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소년을 극진히 사랑했던 어머니는 서점으로 달려가 아들이 원하는 책을 사다 주었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소년이 밤중에 어머니의 머리를 풀어보니 머리카락이 몽땅 잘려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팔아 아들의 책을 샀던 것이다. 소년은 삭발모정(削髮母情)에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목사가 됐습니다. 그가 바로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너무 사랑스럽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합니까? 꼭 껴안아 줍니다. 때로는 엎어 주기도 합니다. 보체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줍니다. 평소 맛있게 먹었던 것을 주기도 하십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해 줍니다. 사랑의 감정이 솟아날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 해 주는 일도 사랑에 의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사랑하실 때 해 주시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도우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당신의 사랑을 수 없이 말씀하십니다. 부단히 확인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방법이 다양하고,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은 걱정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차고 넘치는 복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겨도 염려가 사라집니다. 해결사 되시는 능력자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려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지켜 주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1. 안전히 곁에 머물게 하십니다.

베냐민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이 안쓰러워 늘 곁에 두었습니다. 형들을 따라 애급으로 보낼 때에도 보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잃은 후 막내에 대한 애착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곁에 두어 눈으로 보아야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마치 아버지가 막내를 사랑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는 것이 안전을 보장합니다. 아버지가 보호하시고 울타리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울타리요,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환란 날에 피할 피난처이십니다(시 46:7). 하나님이 그만큼 우리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십니다.

 

2. 날이 맞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날이 맞도록’이라는 말은 하루 종일이라는 의미입니다. ‘보호한다.’는 말은 방패로 막아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막내 아이가 아프면 엄마와 아빠가 밤을 새워 간호합니다. 아이가 먹고 싶다는 것을 사다 줍니다. 아이가 불편하면 자리를 보전해 줍니다. 용변을 보아야 할 때 화장실에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목자가 양을 지킬 때, 하루 종일 양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목자의 관심이 온통 양에게 있습니다. 양을 보호하기 위해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 우리를 보호하시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목자는 피곤하여 졸 수 있고, 사람은 잠을 자야 하지만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십니다(시 121:4).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3. 어깨 사이에 감싸주십니다.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하는 아들 중 하나가 울면 어떻게 합니까? 어머니는 가슴으로 꼭 안아 주며 달래지 않습니까?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따뜻한 품에서 사랑을 느끼고 안심하기 때문입니다. 어깨 사이가 어느 부분입니까? 가슴과 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이 당신의 가슴과 우리 가슴, 당신의 목과 우리 얼굴이 닿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슴이 닿으면 체온이 느껴집니다. 얼굴이 목이 닿으면 생명의 연합을 느낍니다. 그 느낌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닿는 순간 짜릿한 감동을 느낍니다. 복잡한 공원에서 아빠가 아이를 어깨 위에 태우고 다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을 떠나시지도 아니하시고 능력과 사랑의 팔로 감싸 주신다는 것을 믿고 사랑을 입은 하늘 백성으로 살아가는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1. 명령과 약속(수 1:8)

찬송 : 191장(내가 매일 기쁘게)

 

애급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면서 홍해와 광야와 적들을 만났습니다. 이러한 장애와 위험을 겪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다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 놓여 있는 문제일 뿐이었고 그러한 문제와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이 항상 따랐습니다. 이러한 위기와 곤란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나타내 보일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유익이 되도록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책임을 걸머진 여호수아에게 이러한 형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통을 경험하기 위한 선결 요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에 기록된 평탄하고 형통케 되는 선결 요건에 관하여 본문은 통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현실에 대처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든, 사람을 대하여 하든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근거하고 그 말씀에 부합되는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성경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변화되고, 다듬어진 언어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을 주장하게 되면 우리의 언어는 믿음, 소망, 사랑의 색채를 띠게 됩니다. 덕스럽고 은혜스러운 언어가 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그 말씀에 부합된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행동이 믿음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의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고, 변화되고, 다듬어져서 믿음, 소망, 사랑의 색채를 띠는 말, 덕스럽고 은혜스러운 말,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둘째로, “주야로 이 율법책을 묵상하라”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의식(意識), 우리의 사고(思考)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우리의 의식 구조와 사고방식이 성경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사고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색되고 형성되면 정죄 의식 대신 의로운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칭찬과 격려 의식입니다. 그리고 패배 의식 대신 승리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가난 의식 대신 부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변화된 의식,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된 사고는 우리에게 그 같은 체험의 세계를 누릴 수 있게 하여 줍니다.

 

셋째로,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된 행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말이 변화되고 생각이 변화되면 행동도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고가 변화되고 말이 변화되어 따르는 행위는 온전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앞길이 평탄하고 형통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일상생활의 언어를 주장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말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의식과 사고 속에 스며들어 성경적 의식 구조와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당하게 하십시오.

 

이처럼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후에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는 축복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고 있습니다.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합니다. 주야고 그것을 묵상합니다.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행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복을 주십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는 복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 땅에 들어가려면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시고 승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튼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돌파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통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들과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인도와 형통이 있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이처럼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2. 형통의 법(수 1:9)

찬송 : 445장(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주시는 축복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그 축복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과 축복의 말씀을 살펴보면 "강하고 담대하라" 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모든 것을 준비했다 할지라도 결국 실천에 옮길 때는 담대한 신념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담대한 신념이 없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자기가 익히 알고 있는 생활주변에서만 머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새로운 창조란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형통의 능력과 담대하고 강하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까요?

 

1. 하나님을 알아야 강하고 담대해 집니다.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창조주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의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시고 모든 하늘의 만상을 불러내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며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의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이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친아버지가 되심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이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몸과 마음을 맡겨서 하나님을 삶의 근본으로 삼을 때 우리 마음속에 담대함이 생기고 그 힘으로 우리는 형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담대해 집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현실 세상에서는 교회가 하늘나라입니다. 교회를 제쳐놓고 하늘나라가 전파되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를 제쳐놓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큰 역사를 베푸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가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 상처를 주지 말고 교회를 헐뜯지 말고 교회를 보양하고 교회를 잘 세워가는 주춧돌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예수님을 본받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하시고 우리는 마음에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늘 기억하고 그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크게 기뻐하십니다. 마음속에 신앙이 사라지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던 마음에서 감사와 찬송이 나올 때 하나님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고 하늘 복으로 채워 주시고 그 채움 받은 능력이 만사를 형통하게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어야 담대해 집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 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 것을 마음속에 늘 느낄 수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마주대고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하나님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듣고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 말씀이 나를 통해서 담대하게 전해질 때 하늘 능력의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 위에 굳세게 서서 '믿습니다' 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일 들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형통의 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3. 사모하는 마음에서 찬양까지(삿 5:9)

찬송 : 456장(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사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와 고통, 회개와 회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사사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동안 이 패턴이 지속됩니다. 범죄와 고통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심하지 뒤틀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반대로 회개와 회복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정상궤도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범죄할 때 사람들이 즐거워하지만 그 즐거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고통 받을 때 사람들이 아파하지만 그 아픔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할 때 아픔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회복될 때 즐거움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니까 즐거움이 고통으로 갔다가 고통의 모습이 다른 성격으로 바뀌고 또 즐거움으로 변해갑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다가 해방된 이후에 부른 노래입니다. 여사가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전쟁에 나사서 가나안 왕 야빈의 철병거를 물리쳤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전투에서 패하여 쫓겨 가다가 한 여인의 집에서 잠이 들었는데 너무 곤하게 잠이 들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여성이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서 시스라를 제거하였습니다. 이러한 승리 이후에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이 찬양의 노래를 함께 묵상합시다.

 

첫째는, 사람들의 마음에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합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의 힘과 지도력을 반가워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혼자서 할 수 없지만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서 잘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도해주는 사람이 잘 지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잘 지도해 주는 사람을 사모합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등장하기를 바라고 지도자가 잘 인도해 주었을 때 기뻐합니다. 국가의 위기가 생기면 지도자의 지도력이 시험대에 오릅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백성들이 편안해집니다. 지도자의 명성이 올라가는 것은 보너스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최고의 지도자는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것이 주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둘째는, 지도자에게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자기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여기 방백은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우실 때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백성들은 헌신하는 지도자를 기다립니다. 여기 헌신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삶과 생활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헌신하는 지도자는 위기 때 나타나 백성들을 구합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백성들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세우셔서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예수님을 지도자로 보내셨습니다. 사사 시대에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셔서 백성들을 살리시고 세우신 것을 자주 봅니다. 이런 패턴이 예수님에게서 오나성되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찬양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은혜와 축복이 찬송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세우신 것이 찬양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찬양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찬양합니다. 이 땅에 바람직한 지도자가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도자를 세우신 것이 찬양의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인도자가 있고, 영원한 인도자이신 예수님이 계심이 찬양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찬양할만한 이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찬양하는 것을 기뻐 받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찬양한다면 그 찬양은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퍼져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도자로 모신 것처럼 다른 사람도 예수님을 지도자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헌신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의 노래 소리가 생깁니다. 우리의 헌신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기쁨의 찬양소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44. 위대한 이름의 주인공이 되는 길(삼하 7:9)

찬송 : 357장(주 믿는 사람 일어나)

 

성경에는 수많은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한 평생의 삶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가운데 가장 복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가장 험악한 세상을 살다간 악인들도 등장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로 시작된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여호와의 복을 유산으로 남겨준 사람들도 많습니다. 2011년 우리도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으로 천국 생명록에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하나님께 직접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선지자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그대로 받았습니다. 나단이 전한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나단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다윗에게 전하고 다윗은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선지자의 말, 제사장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하나님의 것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일마다 담임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위대한 이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2. 약속을 믿고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의 집 앞을 찾아가야 합니다. 선거 때가 되면 도움을 주는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장에도 갑니다. 목욕탕에도 갑니다. 새벽에도 갑니다. 늦음 밤에도 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시 42:1을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2011년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전을 찾아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응답을 사모하는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야 합니다. 성전을 찾기를 즐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위대한 이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3.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2011년에 구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한 평생 아버지에게 구하며 누릴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전을 찾을 때에 우리는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다윗이 기도할 때는 너무나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며 큰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이 자신의 삶 속에 실현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나단을 통하여 주신 모든 약속이 빠짐없이 실현되기를 구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기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에게만 머무르기를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의 가문을 통하여 연연히 흐르기를 원하였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너무나 구체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의 집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집안이 튼튼한 믿음의 집안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복을 영원히 누리는 집안이 되게 하옵소서. 종의 집이 견고하게 하옵소서. 다윗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집안을 위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나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보다 더욱 귀한 삶을 누리게 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원한 복이 이어지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다윗은 "나의 삶의 복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고백하고 인정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어야 합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기록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또 후손들이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향하여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나와 함께하는 천사들이 하늘 생명록에 오늘 하루를 “잘 했다”고 칭찬받는 사람으로 기록될 때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45.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왕상 2:3)

찬송 : 358장(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시려는 뜻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을 선택하여 특별히 말씀하셨습니다. 몇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달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디까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얼마나 잘 새기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여 솔로몬에게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모습입니다. 지금 다윗은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유언이란 알다시피 꼭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미래에 해야 할 일을 가르치고 준비시키는 말이 유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솔로몬에게 왕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믿음에 관한 유언을 합니다. 이 유언은 다윗의 말 같지만 사실은 이전부터 내려온 말입니다. 다윗 이전부터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무엘 등의 예언자들이 믿음을 지키며 가르쳤던 말입니다. 다윗이 이미 알고 있었던 말, 솔로몬에게 전하는 말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고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그 뜻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았습니다. 그 계명이 넓게는 다윗 이전의 시대 즉 창세기부터 사무엘하서가지 기록되어 있고, 좁게는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와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좁게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당연히 지켜야 할 계명 즉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미래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말씀의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신앙 곧 말씀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윗의 말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에서 제시한 길로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법률, 계명, 율례와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모세의 율법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키는 신앙입니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하신 바이기 때문에 지킵니다. 왕이 먼저 지켜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의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왕과 백성들이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셋째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형통케 하십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하나님은 왕과 백성들에게 형통함의 복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여기 형통함이란 사람의 듯대로 되는 형통함이 아닙니다. 그 형통함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의 형통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의 형통함입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형통함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형통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 모두 형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을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들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지켜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선택하신 것이 은혜이고, 말씀을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말씀을 지키도록 힘을 주시고, 지킨 사람에게 형통케 하심이 은혜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을 지키는 은혜, 하나님이 형통케 해 주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6. 내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왕상 8:39)

찬송 : 455장(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어느 주일 아침 미국 대통령이 출석하는 워싱톤 교회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이 “오늘 주일에도 우리 대통령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대통령이 오실지는 잘 모르겠습다만, 하나님은 꼭 오십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 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면 교회로 와야 합니다. 교회 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교회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 와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해야 응답을 받습니다. 교회에 와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습니다. 교회 와서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아 누리면서 우리 마음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2011년이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말한 우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음식이 차려져 있는데 그것을 긴 숟가락으로 먹어야만 했습니다. 지옥에서는 긴 숟가락을 가지고 음식을 자기 입에 넣어 먹으려 하니 하나도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긴 숟가락을 가지고 서로 상대방에게 음식을 먹여 주니까 모두가 배부르게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먼저 챙기려 하기보다는 먼저 상대방의 유익을 챙겨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며, 자신의 인격이 아름답게 구비되려면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2.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사시대의 나오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나오미는 편법을 쓰지 않았고, 육신적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일을 행하였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했기에 마음에 담대함을 가질 수가 있었고, 그 마음의 소원이 응답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음의 소원이 응답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응답해 주십니다.

 

3. 마음의 소원은 구체적인 계획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돼지가 떼를 이루어 운동장을 달리는 꿈을 꿨습니다. 그런데 응원석에는 수많은 개들이 짖어대며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꿈을 꾼 것입니까? 개꿈을 꾼 것입니다. 우리들도 단순히 꿈만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개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올 한 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구체적이면서도 실현 가능한 계획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4. 마음의 소원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여 행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간절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위대한 일은 항상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여 행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목사가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 비전을 함께 이루기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 함께 순종하여 나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루기 시작되는 아침마다 가장 먼저 내 마음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루를 함께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어떤 소원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기도로 아뢰고 이루어지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위대한 존재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조류독감도 광우병도 테러도 전쟁도 핵의 위험도 막지 못합니다. 내 얼굴에 깊게 팬 주름도 기미나 주근깨도 내 힘으로 없애지 못합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앙, 질병, 실패, 고통, 죽음도 막아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린 이쯤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을 들고 기도해서 내 마음에 임하시는 하나님은 기쁘시게 해서 품은 소원을 이루어 가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47. 찬양의 요소(대상 16:8-9)

찬송 : 199장(나의 사랑하는 책)

 

찬양이 더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늘 찬양해야 하는데, 특별히 하나님께 찬양을 하고 싶을 때가 더 강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은 감사가 드려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 이렇게 됩니까? 내 일이 잘 되면요?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면요? 사업이 번창하게 되면요? 무엇인가 기도할 때 응답되면요? 혹은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예배를 드릴 때요? 하여간에 우리가 잘 되었을 때 찬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잘 되면 찬양하려는 마음보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 뻐기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우리 마음이 방향을 잘못 잡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간절히 원했을 때 이루어지면 다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확실하게 더 생깁니다.

본문의 말씀은 다윗의 찬양입니다. 다윗이 특별한 찬양을 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옮겨올 생각에 심취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궤가 옮겨왔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찬양했습니다. 이것을 본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흉본 적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흉보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도 하나님 앞에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사람들을 그룹으로 세우고, 각각의 역할에 따라서 찬양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성악을 하는 그룹, 기악을 하는 그룹, 지휘를 하는 사람 등 주어진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다윗이 성가대를 세우고 성가대를 향하여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 다윗의 권면을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양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찬양의 중요한 원칙과 자세는 감사입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감사가 있습니다. 감사가 없다면 찬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속과 겉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다윗은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 감사가 찬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돌아왔기 때문이고, 찬양 사역자들이 세워지고 각각의 역할에 따라서 찬양하는 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권면하는데, 그 권면 속에 감사하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감사할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권면합니다. 찬양 사역자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입니다. 찬양의 원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권위를 드러낸 것이 찬양합니다. 거기에 곡조가 붙어있기도 하지만 곡조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높인다면 그것이 곧 찬양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영광의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존재를 드러내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찬송입니다. 우리가 하는 찬양 중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도 있고, 우리가 받은 구원과 은혜를 드러내는 일도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우선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하나님의 권위와 존재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이후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입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이 할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이것은 전도라고 말하기도 하고, 선포라고 말하기도 하면 혹은 선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선포하든지, 선교하든지 그 사람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이름을 드러내게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사람들에게 알릴 때는 노래를 하고 찬양을 하며, 하나님의 하신 일을 말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와 찬양이 나오고,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 우리 모두에게 하신 일을 전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찬양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할 사람을 세운 뒤에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권면 속에는 감사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권위를 드러내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기를 권면합니다. 오늘 우리도 찬양할 기회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이 있었고 그것들이 해결되었을 때 하나님을 특별히 찬양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일이 있습니다. 감사가 담겨있고,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찬양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소망이 우리 안에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8. 너와 함께 하리라(대상 17:8)

찬송 : 453장(예수 더 알기 원함은)

 

젖동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다가 난산으로 목숨을 잃거나 사고를 당하여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을 수 없을 때 아이에게 젖을 얻어 먹이려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기에게 젖을 줄 사람을 찾아 먹인 것이 젖동냥입니다. 아기 아버지는 아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젖을 먹여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게 하고 싶은 염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마치 젖동냥을 하기 위해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아기의 아버지같은 심정으로 쉴 사이 없이 움직이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일하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최고의 일이 바로 젖에 감히 비길 수 없는 영원한 생명수를 십자가에 죽음으로 흘려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일 중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에 매달리면 인생을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1.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이처럼 처음엔 필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중엔 어떻습니까? 나중에 가 보면 그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일인가, 그 일을 하길 얼마나 잘 했나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언뜻 보면 필요 없는 것, 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이지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하나는 필요 없어 보인다고 하지 않는 교회, 다른 하나는 필요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고 하는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까? 가정의 일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학생에게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것을 혼동하면 그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가 됩니다. 우리 인생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 지금은 필요한 것 같아서 기를 쓰고 얻으려고 하지만, 우리 인생에 짐만 되는 것을 모아 쌓고 계시지 않습니까? 필요한 것 같지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의 일을 이제 그만 할 때입니다. 그 대신 필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정말 필요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2. 하나님의 일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꿈꾸고, 그 일을 위해 씨앗을 심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시오. 지금은 어려워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사람이 집을 세우고자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사람이 성을 지키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적이 침략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 안에서 열매가 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실패할 사람의 일에 매달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RP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은 하면 복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손해인 것처럼 보이지만, 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태평성대에 산 위에 배를 만드는 노아를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 방주를 짓는다고 얼마나 많은 재물을 쏟아 부었겠습니까? 그러나 나중에 홍수가 세상을 뒤덮었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당장은 손해인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으로 복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우리를 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복이 될 것 같은데, 마지막에 가 보면 저주가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투자하십시오. 우리 주변에 있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친구나 친척을 섬겨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교회와 가정에 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역에 많이 베풀고 선교하면 반드시 복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당장은 손해인 것 같고,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손만대에 복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매 순간 하나님은 “내가 정년 너와 함께 하리라”는 하늘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9. 하나님의 회복(대하 7:14)

찬송 : 197장(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특별하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별한 기회에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내용으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을 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시간은 특별한 기회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이 모여서 함께 기뻐 찬양하면서 봉헌식을 합니다. 그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흡족하셔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본문이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특별한 기회에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내용으로 하시는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하여 백성들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 회복은 성전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성전에서 행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있으면 회복이 잘 안 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있으면 하나님이 회복될 것입니다. 사실 여기 등장하는 믿음의 행동들은 다른 곳에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만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 일을 하면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회복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믿음의 모습들이 어떠합니까?

 

첫째는, 악한 길에서 떠나는 모습입니다. 세상에서는 악한 길에서 떠나기 어렵습니다.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것은 악한 일이 있는 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선한 일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야 합니다. 선한 일이 있는 곳이 아디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악한 길에서 떠나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 사람들에게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컫는 사람은 반드시 선할 길로 갑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둘째는,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겸비하다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면 회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되 이렇게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회복시켜 줍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기도를 하고, 때에 따라 구제한다고 시장 어귀에서 기도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세리처럼 겸비한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시고, 겸비한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기 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고, 하나님의 일이 확장됨을 보고자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과연 살아계셔서 자기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성전에서 이루어집니다. 성전이 아닌 곳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특별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의 얼굴을 뵙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교회에서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기도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혹시 범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듣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때문에 상한 사람들과 사는 지역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셨다 할지라도 책망을 거두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셨다 할지라도 그 징계를 중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찾는 사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복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성도들과 교회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회복과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회복과 축복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0. 고난은 축복의 문인 것을(욥 5:6-8)

찬송 : 429장(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입니다. 기도문 가운데에도“시험이 없게 하옵시고”가 아니라“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태복음 6:13)하셨습니다. 시험 즉 고난은 언제나,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고난의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잘못의 대가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는 연단을 위해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나의 연약한 면을 강하게 하시려는 뜻의 고난이 있습니다. 욥기 23:10 말씀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하셨습니다. 금광에서 캐낸 광석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습니다. 뜨거운 용광로를 거친 후 비로소 순금이 되어 금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처럼 사람도 동일합니다. 시편 119:67에 “고난당하기 전에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2:10에는“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해 사람다운 사람으로 가다듬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존슨 전 대통령은 사람을 채용할 때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채용을 꺼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 쉽게 출세한 사람은 독선적이기 쉬우며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아 인간다운 인간으로 다듬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고난이 올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히브리서 2:18 말씀에“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하셨습니다. 또 약속하시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고난의 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2.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119:92의 말씀에“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 하였다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난의 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며 새로운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0-31)하셨습니다.

 

3. 고난이 올 때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13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하셨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하셨습니다.

누구나 다 고난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이긴 뒤에는 반드시 예비 된 축복이 있습니다. 천둥과 번개 속에 생명의 단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기 전 반드시 그 사람을 연단시키십니다. 훈련된 병사가 적군을 이기는 강군이 됩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고난의 이치를 깨달은 록펠러는 말하기를“나는 고난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알고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고난에 익숙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모두 고난의 날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2011년에는 고난 많은 세상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센 믿음으로 험한 세파 헤쳐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1. 위대하신 하나님(욥 5:9-11)

찬송 : 190장(성령이여 강림하사)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조지 뮬러 목사님은 애쉴리 타운이라는 큰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날 고아원의 보일러가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보일러를 고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려야 하므로 고아원은 온통 비상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조지 뮬러 목사님에게 뛰어와서 “목사님, 목사님, 큰 일 났습니다. 영아들이 있는 동에도 보일러가 고장 나서 아이들이 다 얼어 죽게 되었습니다.” 하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뮬러 목사님은 일어나 성경책을 옆구리에 낀 채 교회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 했습니다. “날씨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어린아이들은 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생명들입니다. 이 어린 생명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저는 총무일 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시간과 때를 주장하시는 아버지께서 일주일 동안은 봄 날씨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조지 뮬러가 부르짖어 간구하는 동안, 갑자기 동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영국 전체가 봄 날씨로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기상 이변도 흔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지 뮬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북풍을 중지시키고 동남풍을 불게 해서 영국 전체가 온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보일러를 수리한 후 정상적으로 가동하자 다시 한 겨울의 세찬 바람이 쌩쌩 불어왔습니다.

 

본문은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변론입니다. 엘리바스는 죄인들이 결국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즉,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고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일이므로 고통에 처할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도리라고 엘리바스는 주장합니다. 엘리바스의 생각이 언제나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욥과 변론할 때 욥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오늘 본문에서 엘리바스가 증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요?

 

첫째는,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엘리바스가 말합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의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다 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의 이성과 생각으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도 악하기 때문에 벌을 받아 그럴 수도 있고, 선한 일을 하면서 핍박을 당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기 전에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자연을 움직이십니다. 엘리바스가 말합니다.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땅에 보내시며.” 하나님은 땅에 비를 내리십니다. 비를 내려주심으로 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하십니다. 비가 내림으로 식물이 자라고 동물들이 물을 마십니다. 사람이 살아갈 식수를 제공받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낭패입니다. 엘리야 시대 때 삼년 반 동안 기근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엄청나게 고통을 겪었습니다. 요즘에는 기상이변 때문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 예년에 비해 강우량이 현저히 적은 곳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 중 하나가 비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중에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단비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삽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사람의 위치를 역전시키십니다. 엘리바스가 말합니다.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높은 사람을 낮은 곳으로 내리실 수 있고, 낮은 사람을 높은 곳으로 올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면 사람의 위치는 순간적으로 역전됩니다. 그러므로 높다고 해서 교만하면 안 되고, 낮다고 해서 좌절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장하심에 맡겨햐 합니다. 하나님이 높이실 만한 사람이도록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큰 은혜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적절한 때 적절한 비를 내리시듯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앉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본문과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2. 빛을 따라 살면 흥합니다.(욥 22:26, 28)

성경 : 428장(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삶이 만사형통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결정해도 흠이 없고, 좋은 결과를 얻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를 인도할 때 만사형통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흥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욥은 극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하여 갑절의 축복을 받은 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찾아와 다시 흥하게 되는 비결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 2011년 우리는 어떻게 해야 고난 속에서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살 수 있는지 그 비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과 화목하면 됩니다.

‘화목’이란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밀착시킨다, 아주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과 자리를 같이해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감히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이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4:8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탕자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사업에 실패하여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만 하면 반드시 다시 흥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되게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9:20에 보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17에도 보면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자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둔 자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는 말씀을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3. 불의한 일들을 멀리하면 됩니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23절) 불의한 재물은 천만금이 자기 손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축복의 조건이 못됩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화가 임할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은 언젠가는 다 밝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사가 베어드는 ‘인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맷돌이 돌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직하게 살다가 좀 손해를 보고, 또 정직하게 산다고 ‘바보’라는 말을 들어도 정직하게 살면 나중에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잠언 14:11에 보면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정직한 자는 망하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반드시 흥하게 됩니다. 욥기 8:5~6에도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올 해 2011년에는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두며, 불의를 멀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흥하게 해주십니다. 빛으로 인도함을 받는 한 해가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분의 보배가 되어주십니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우리의 보배가 되시며, 귀한 은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빛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경영하는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일 년 열 두 달이 형통하게 됩니다.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28절) 그러므로 올 2011년에는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불의를 멀리하고 정직하게 살아 다시 흥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3. 정금 같은 길(욥 23:10)

찬송 : 422장(거룩하게 하소서)

 

사람이 사는 세상에 고난이 많습니다. 잘못을 저질러서 고난 받는 경우도 있지만, 옳은 일을 하고도 고난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데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한 사람, 착한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느냐며 의심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그것도 하나님이 왜 악한 사람을 벌하시지 않느냐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기도 합니다. 확실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현상들이 사람들의 삶 가운데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본문은 동방의 의인 욥이 고난을 당하는 장면에서 욥이 자신의 고낭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하는 장면입니다. 비록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연히 고난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의도와 목적이 고난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대로, 악한 사람은 악한 사람대로 하나님이 목적을 갖고 고난을 주십니다. 특히 선한 사람일 경우에는 하나님이 감당할만한 고난을 주시고, 또 시험을 이길 능력까지도 주십니다(고전 10:13). 혹시 우리 가운데도 어려움이 있습니까? 오늘 욥의 고백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갖고 계시는지 자세히 알아봅시다.

 

첫째는, 하나님이 욥이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욥이 의인으로 가는 길, 고난의 와중에서도 하는 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일 등 하나님이 욥의 말과 행동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과 마음과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라도 세신 바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중에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갖고 계실 것임을 알고 묵묵히 견뎌냅니다. 고난 중에 견뎌내는 힘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맡기는 믿음이 고난 이후에 승리를 경험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욥을 단련하십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단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기 말하는 단련이란 쇠붙이를 용광로 속에 넣었다가 꺼내서 망치로 때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옛날에는 농기구를 대장간에서 만들었습니다. 용광로 안에 쇠를 넣고 꺼낸 후 망치로 때립니다. 어느 정도 만들어지면 일단 물에 한 번 넣은 후에 또 용광로에 넣습니다. 그리고 망치로 때리고 또 물에 넣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강한 농기구가 만들어집니다. 무기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기구를 단련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도 단련하십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더 강한 믿음을 갖게 하고, 고난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합니까? 혹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하나님을 외면합니까?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의 단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어떤 점을 변화시키려 하시는지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합니다.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것이 성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단련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셋째는, 정금같이 나오게 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대장간에서 농기구도 단련을 받고, 칼도 단련을 받습니다. 사람은 시험과 고난을 통해 단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단련 후에는 어떤 일이 생깁니까? 욥은 자신이 단련을 받은 후에 정금같이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금도 단련 이전에는 원석이지만 잡석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불순물이 섞여 있어서 값어치가 별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련 이후에는 정금이 되었습니다. 값어치가 많이 나갑니다. 값어치가 나가려면 반드시 단련이 거쳐야 합니다. 혹시 원석 자체가 순금이라 할지라도 단련을 통해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반지나 목걸이가 되면 사람들의 선택을 받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연인도 귀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시키시면 정금같은 존재 더 귀한 존재로 변화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주십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정금같은 믿음이 생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로 인하여 능히 이기고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소유하는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4.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축복(욥 33:26)

찬송 : 293장(주의 사랑 비칠 때에)

 

욥기서는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리우던 욥이 당하는 고난을 통하여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그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고난 속에서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기도하는 자를 기쁨으로 넘치게 하고 하나님의 얼굴까지 볼 수 있는 복을 허락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2011년 아무리 힘들고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기도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살기만 하면 욥에게 주셨던 축복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될 뿐만 아니라 만사를 하나님의 공의로 형통케 되는 한 해를 사는 은혜를 누리는 2011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히브리어로 4개의 단어와 헬라어로는 두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단어는 “헤세드(דסֶחֶ)”입니다. 이 단어는 사랑, 친절, 긍휼, 자비, 호의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의 단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카리스(χαρις)”입니다. 우아하고 매력 있고 사랑스럽고 친절히 대하는 것, 호의, 신적 은혜의 선물,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때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은혜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인생이 확 바뀝니다.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은혜를 입은 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만도 귀한 일이지만 거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은혜는 실로 크다 하겠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칭함을 받은 사람이 롯입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입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왕상 8:23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정직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시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잠14:9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셋째,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잠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넷째,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 욥 33: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욥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이 달라진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가 임할 때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시련이 축복으로 바뀝니다.

 

그런 은혜를 받으면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삶이 됩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기쁨으로 대하면서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5. 복 있는 사람의 결과(시 1:1-3)

찬송 : 528장(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고자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복된 사람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된 사람이라는 영적 자존감을 주시고,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시고 복된 사람이 더 많아지게 하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특히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지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다보니 악한 사람,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싫어합니다. 복된 사람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구별하여 행합니다.

 

하나님은 복된 사람이 얻는 축복도 말씀하십니다.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 현실적으로 힘들 때도 있지만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면서 어려운 현실을 견딥니다. 하나님이 복된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복된 사람에게 축복의 시각효과를 사용하여 보여주십니다. 시냇가의 나무를 상상하고 그 나무의 모습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강하게 기억됩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첫째는, 열매를 맺습니다. 복된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의 용도가 다양합니다. 목재를 제공하는 것, 모양과 향기를 제공하는 것, 그늘을 제공하는 것, 열매를 제공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무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고 삽니다. 그 중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나무로부터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나무 열매 즉 과실은 사람에게 각종 영양소를 제공합니다.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면 만족합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을 시기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복된 사람에게 말씀의 씨앗을 심으시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갈 5:22~23). 우리 마음의 밭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 맺힌 나무가 보기 좋듯이 하나님도 열매를 맺는 우리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보기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둘째는, 잎이 마르지 않습니다. 심한 가뭄이 들면 나무가 시들어집니다. 잎이 마릅니다. 그늘을 제공하지도 못합니다. 비가 내리고 뿌리에 물기가 제공되어야 나무가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나무가 시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수분을 계속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마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넓고 싱싱한 잎으로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합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잎이 말라 있다면 죽은 나무입니다. 죽은 나무는 땔감 밖에 쓸 일이 없습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가 살아있는 나무입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안식을 제공합니다. 작은 겨자씨가 뿌려져 큰 나무가 되었을 때, 수많은 새들이 그 그늘에서 쉽니다(막 4:31,32). 신앙인도 다른 사람에게 편안함과 안식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셋째는, 행사가 형통합니다. 계획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구든지 거창한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입니다. 실패하더라도 계획을 세워보는 것이 좋습니다. 계획이 없다면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계획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이후 성공을 거둡니다. 사람의 계획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잠 16:9). 올 한 해 우리가 세운 계획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계획, 신앙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형통이란 우리가 계획하는 것을 이루고, 우리 앞에 장애물을 치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십니다.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아름다운 삶 가운데 주어집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복의 사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심으로 복을 알게 하시고 복된 생활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지킴으로 복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복된 사람으로 열매를 맺고, 다른 사람에게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형통하게 하십니다. 우리 가정에 이러한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올 한 해 하나님이 열어 가시는 복된 삶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6. 응답주시는 하나님(시 3:3-4)

찬송 : 563장(예수 사랑하심은)

 

어떤 여 집사님이 1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담임목사는 늘 흐뭇한 마음으로 그 믿음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무슨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으신가 보군요.” 집사님은 천연덕스럽게 새벽기도에서 10년 동안 주택복권 당첨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얘야, 제발 이제는 복권을 사고 기도하는 게 어떻겠니?”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자신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며 기도응답을 기다리면서 정작 우리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변화 없이 그저 중언부언하고 있지는 않는가 말입니다. 우리 자신의 기도를 가만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 받을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 만복의 하나님께 만복을 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응답의 노력은 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 왜 이루어주지 않느냐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시편 3편에 있습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망할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입니다. 압살롬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와의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행동하는 것은 이름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아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을 무엇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들끼리 싸우는 것도 아버지 마음에는 상처이고, 아들들끼리 살육을 벌인 것도 괴로워 견딜 수 없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합니다. 용서를 모르는 아들은 아버지마저 원수로 여깁니다.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배우지 못하였으니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고 칼을 들이댑니다. 권력이 무엇인지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습니다. 권력은 마약과도 같다고 합니다. 한번 경험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한번 맛보면 놓치기 싫어합니다. 무슨 수단을 동원하던지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피흘림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왕위뿐만이 아니라 그 목숨까지도 빼앗고자 했던 사건은 아슴 아픈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밧세바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재앙이기도 합니다. 이 당시 다윗이 얼마나 괴롭고 비참했던지 사무엘하 15:30에서는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많은 대적들이 일어났으며, 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확신을 흔들어 놓아 그가 의지할 것이 없어 절망하고 자포자기 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 자신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면서 그 상황이 숨통이 막힐 것 같은 환난으로 가득 찬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은 환난으로 가득찬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 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다”라고 외치는 다윗의 믿음을 보면서 오늘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으려는 사탄의 시험이 난무하고 있지만 언제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성도의 지혜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환난을 겪고 자주 핍박을 당해 비참한 상황에 빠지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윗은 오뚝이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분명한 기도 응답의 체험을 했고,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깊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거의 체험과 확인들이 쌓였기 때문에, 다윗은 이토록 엄청난 환난의 때에 믿음의 사람으로서 흐트러짐이 없는 대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 확고한 믿음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다윗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기도를 들으시는 줄을 믿었습니다. 붙들어 주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언제든지 들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많은 대적들 가운데서도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고 평안히 자고 깨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셔서 자기를 붙들어 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어떠한 경우이든지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고정시키십시오. 그리하면 고난의 파도를 능히 넘게 하는 놀라우신 은총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57.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시 4:3-5)

찬송 : 455장(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가졌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열려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말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라고 말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하신 일이 있고, 우리는 그 일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를 받았기에 은혜에 당연히 감사하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경건한 사람으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열린 관계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열국의 아버지로 삼아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선택하셔서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을 선택하셔서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모두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으로서 한 가지 흠이 있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경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선택하셔서 야곱의 가족을 굶주림의 위기에서 구하셨습니다. 요셉은 경건한 사람의 모델입니다. 또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모두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경건한 사람으로 살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경건한 사람으로 불러 사용하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에 있는 사람은 선을 행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떨며 범죄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주를 살피고 계시는데, 자기도 살펴보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높입니다. 이것이 선이고 의로움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관계가 어그러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는 앞에서 범죄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백성들을 이방 민족에게 붙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사사기에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입니다.

 

셋째는, 의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가 되어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증명하는 일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광의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역시 예배드림이 기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을 알게 되고 더 많이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자기를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힘센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우상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에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맺혀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경건한 사람으로 부르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를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감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도록 지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의의 제사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오직 당신만을 의지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람을 안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당연하고 기쁨이 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성도들과 교회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갖고 게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올 한 해 이 가정에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 하나님의 뜻대로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이 기뻐보시며 넘치는 복으로 채워주시는 이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8.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시 5:11)

찬송 : 401장(주의 곁에 있을 때)

 

시편 5편의 시는 원수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간구하는 탄원의 시이기도 합니다. 탄원으로 응답받은 인물은 히스기아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탄원의 영성을 알고 우리의 탄원을 들으시고 응답주시고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을 아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서 히스기아는 옷을 찢어버리고 성전에 들어가 엎드렸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어쩌다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어쩌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저 이방의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무시를 당한다는 말인가? 히스기아는 하나님께 아뢰는 방법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통곡합니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히스기야의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죽을 목숨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벽을 향해 엎드려 통곡합니다. 그 벽이 유명한 통곡의 벽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선을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탄원합니다. 이미 죽을 목숨인데 탄원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탄원하는 기도를 한 히스기아에게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히스기야의 탄원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소식입니다. 가장 듣고 싶었던 소식이었습니다.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물 한 모금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삼년 후에는 포도원 열매를 먹게 될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 징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하룻밤에 십팔만 오천의 앗수르 군대를 치셨습니다. 본국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헛소문을 들은 산헤립은 본국에 돌아갔지만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죄의 댓가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10절)

 

히스기야의 통곡이 즉시 응답되었습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인생을 정리하라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지시를 받았습니다. 히스기야의 죽음도 하나님이 알려 주셨는데,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혀 다른 내용을 듣습니다. 이사야가 성을 나가며 채 중간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사야가 전달한다.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게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 것이며”(왕하 20:5~6) 이사야는 무화과 반죽을 히스기야의 상처에 놓으라고 시켰습니다. 과연 삼일만에 상처가 깨끗하여졌습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에 들어갈 정결함을 가졌고, 그에게 스스로 성전에 걸어서 올라갈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15년 동안 더 살 징조로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갔습니다.

 

히스기야의 탄원은 두 번이나 응답되었습니다. 위기의 상황이니 응답이 뒤로 미루어질 수 없습니다. 거짓말처럼 응답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기적이니, 우연이니 의심하며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징조가 있으면 믿게 될 것입니다. 두 번의 응답에 모두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한 번은 삼년 만에 포도원 열매를 먹는 것이요, 또 한 번은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한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즐겁게 하셨습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11절)

 

탄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심령이 메마른 사람은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칭 도덕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 자기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은혜를 입었으므로 자기 삶에 도덕과 업적, 능력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들의 심령이 메말라 있다면 그들의 현실은 은혜가 아니라 유혹에 불과합니다. 은혜는 의인에게 경험되어집니다. 비록 탄원밖에 할 수 없는 고통의 늪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의인은 은혜를 경험합니다. 은혜는 탄원의 상황에 처한 의인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하나님의 영적 울타리가 됩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로 응답받는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9. 하나님이 우리를 호위하신다(시 5:12).

찬송 : 301장(지금까지 지내온 것)

 

한 젊은 육상 선수가 올림픽에서 명성을 얻은 뒤 성공을 거둔 소감을 말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나와 함께 달려주셨기 때문에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해설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이 이기도록 도우셨다는 말은 아니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훈련하는데 필요한 준비도 못했을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할 필요성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달려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늘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입니까? 우리는 너무도 자주 매일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지금껏 살아온 하루하루 삶의 기적,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능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과 세상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신 그분을 인정할 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더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알고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며 전파합니다. 앞의 육상선수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더 자세히 살펴봄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알면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사람을 가립니다. 아무에게나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의인에게 복을 주십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의를 행하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는 사람입니까? 혹은 구제하는 사람입니까? 그것보다 더 우선적인 의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행함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을 의인으로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아름다운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복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의인되기 위하여 한 일이 별로 없는데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진행하시며 결과까지 책임져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째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말하라면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죄를 지어 에덴에서 쫓겨나고 죄의 자손들을 낳았습니다. 우리도 죄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우리는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존재감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부름받은 사람을 의인으로 삼으셨습니다.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되어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아록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는 알고 있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호위하십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를 호위하신다니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원래 호위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하는 행위입니다. 병사들이 장군을 호위합니다. 백성이 왕을 호위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호위합니다. 전쟁터에서는 병사가 왕을 호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호위하신다니 이게 웬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군사가 방패로 장군과 왕을 호위함처럼 하나님이 방패로 믿음의 사람을 호위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믿음의 사람을 호위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믿음의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늘 임함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삼으시고 복을 주시고 호위하시는 은혜가 이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60. 내 영혼의 안전지대는(시 12:5-6)

찬송 : 249장(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국어사전에 보면 "안전지대"란 「도로를 횡단하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정해 놓은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해 정해 놓은 그 안전지대 안에서 가장 빈번하게 가장 큰 사고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합니다. 이게 세상의 모순입니다. 이 모순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안전지대를 오늘도 찾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지대는 우리인류의 소망이요 꿈입니다. 우리 영혼의 안전지재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1.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의 안전지대입니다.

시편 12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안전지대에 두시겠다"고 약속했고, 시편 46편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했습니다. 찬송가 중에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만 안전지대가 가능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피하였다!" 이 선언은 나는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무력을 발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국제관례상 망명자는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로 피한 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시겠습니까? 특히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피난처라는 말의 뜻 가운데는 "높은 곳"이란 뜻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땅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안전지대는 낮은 곳에 -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전지대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 주님의 품 그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우리의 안전지대가 어디뇨? 하나님의 품 안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입니다.

 

2.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안전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땅 어디에서 안전지대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구요. 오히려 진정한 안전지대는 바로 내가 있는 그 곳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에 가든지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안전지대 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한 내가 서 있는 그곳이 안전지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복을 받아 가정에 가면 가정이 안전지대가 되고 내가 직장에 가면 그곳이 안전지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모든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됩니다. 죄를 짖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 때에도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과거의 모든 죄, 현재 지금 짓는 모든 죄, 미래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해 주십니다. 이 세상이 안전지대로 알고 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진정한 안전지대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그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바로 그 곳입니다.

 

3.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영원한 안전지대에 갈 수 있습니다.

궁정동의 어느 안가가 안전지대라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최고 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는 위험천만한 지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철조망을 치고 군인들이 지키고 경호원들이 옆방에서 총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은 바로 그 안가에서 총을 맞아 죽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궁극적인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중립국가에도 질병이 있고 태풍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죽음이 있고 재해가 있습니다. 영국이나 아프리카에도 사고가 있습니다. 그곳은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계시록에 보면 오직 하나님 나라에 만이 사망이 애통이 질병이 없다고 했습니다. 슬픔이 절망이 흑암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안전지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바라봅니다. 사모하며 소유하기를 힘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지대에 두시기 위해 그 곳을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밝혔습니다. 영원한 안전지대는 미국이나 중립국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안전지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오히려 땅위에서 시련을 받고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의 시민 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전한 삶을 원한다면.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평안을 원하고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 생활을 희망한다면, 예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 지상에는 어디를 가나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안전지대, 그 곳에서 참 쉼을 얻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의 은총이 2011년에 넘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1. 하나님이여 도우소서(시 17:1-2)

찬송 : 344장(믿음으로 가리라)

 

학생들이 학교 공부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공부에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선생들의 도움만으로도 모자라서 학원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과외공부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가정교사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자녀들의 도움을 위해서 부모님은 돈을 씁니다. 때로는 비싼 과외를 위해 목돈을 한 번에 쓰기도 합니다. 교육의 열기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어쩐지 씁쓸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 스스로 공부하는 분위기보다는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공부하는 습관이 학생들의 삶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자기주도학습 혹은 스스로 학습이 유행입니다. 자기주도학습은 자기의 공부를 자기가 돕는 것입니다.

 

자기주도학습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공부한 것으로 남을 돕는 것입니다. 남의 공부를 도와주면 자기도 공부가 잘 됩니다.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됩니다. 실제로 공부를 잘 하면서 친구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학생은 자기 시간을 내어 친구들의 공부를 도와줍니다. 이 학생은 미래에 여러 사람을 돕고 세울 수 있는 지도력까지 함께 배워가는 것입니다. 어떤 엄마들은 “너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친구 생각하느냐?”고 타박하지만 아이들이 남을 돕도록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의 인성교육이나 학습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처럼 남을 돕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보았을 때 생겨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살펴보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사업을 해서 성공한 사람은 소비자나 거래처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움 받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누는 사람으로 발전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도우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을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는, 하나님이 의의 호소를 들으십니다. 도움을 구하되 돕든지 말든지 알라서 하라고 한다며 도울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호소하듯이 도와달라고 해야 합니다. 게다가 반드시 도와야만 한다는 호소가 필요합니다. 의의 호소입니다. 옳은 생각을 갖고 옳은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이 호소를 들으십니다. 이 호소에는 울부짖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 고난당할 때의 울부짖음, 하나님 편에 서려는 처절한 노력이 담긴 울부짖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고통을 당합니까? 억울한 일을 당합니까? 울부짖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듣되 귀를 기울여 들어주십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세심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영혼에 대한 관심, 생명에 대한 관심, 축복에 대한 관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려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 일을 얼마나 잘 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을 키우는 일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귀를 기울려 들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살피시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우리의 말이 옳은지, 우리의 행동이 바른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하는지 등등 하나님이 우리를 살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공평함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옳고 그름을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그 판단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긍휼로 판단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점수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장점을 보십니다. 우리의 미래 가능성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판단은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한 판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되 칭찬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니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니 우리가 울부짖어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살피시고 판단하시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보여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은혜가 올 한 해 이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2. 나의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시 18:1-2)

찬송 : 302장(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사람에게 있어서 힘은 매우 중요합니다. 힘이 있어야 생명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사실 힘이 다 되어 영혼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어떤 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병을 이길 수 있는 힘만 있다면 그 병을 능히 이기고 건강할 수가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일을 더 잘할 수가 있고 힘이 없으면 아무리 의욕이 있다 할지라도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힘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력이 있고, 재력이 있으며, 권력이 있고 또한 체력 등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성경 원문에서는 '게브라'(GEBRA)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영양제로 한국에서도 즐겨 복용했던 '게브랄티'라는 종합 비타민이 있었는데, 이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힘이라는 '게브라'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3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힘입니다. 불가능이 없는 힘입니다. 신실한 힘입니다. 이 힘으로 2011년을 성공적으로 사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곧 “나의”라는 말입니다. 나와 관련성이 있는 하나님입니다. 남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나를 대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신앙고백이요, 동시에 신앙의 다짐입니다.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정체성에서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다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자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불신자는 세상에서 보이는 것과 물질적인 것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 나의 요새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요새란 전쟁터에 나간 군사들이 구축해 놓은 방어진지입니다. 요새는 적군이 공격해도 쉽게 돌파되지 않는 튼튼한 곳이어야 합니다. 모래성이나 흙으로 아무렇게나 쌓아놓는다면 요새는 쉽게 허물어집니다.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그러므로 요새는 든든히 구축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반석으로 든든하게 구축된 요새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마귀로부터 수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알게 모르게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싸워 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스스로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신 33:29). 어떤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요새요, 나아가 승리를 보장해 주는 요새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의 요새에서 보호를 받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것은 그의 생명을 구해주는 것입니다. 위기를 당한 사람을 건져내는 것은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새롭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신 분입니다. 위기에서 구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살아갈 소망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건지다’는 말은 원래 구원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구원의 본래 의미가 ‘건져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영원한 죽음의 위기에 있는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아니 이미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엡 2:1). 생명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일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이미 받았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피난처가 있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피난처라고 알려 주십니다.(시 48:3). 산 위에 세운 성보다, 중국의 만리장성보다 더 든든하고 안전한 피난처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피난처, 영혼의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적 고향입니다. 하나님이 팔을 펼쳐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면, 불안에 떨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벗은 채 불안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셨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롬 13:14).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2011년 도 어떤 고난이 와도 환난이 외도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의 요새에서 승리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3. 들으시는 하나님(시 18:6)

찬송 : 242장(황무지가 장미꽃같이)

 

고속도로 상에서 일가족을 태운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막내딸은 자기 아버지의 차가 다른 차들을 제치며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즐겁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우리 아빠 차가 제일 좋다. 우리 아빠 차가 이 세상에서 제일 빠르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다른 차가 그 차 앞에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빠, 빨리 저 차를 따라가요, 어서요!’ 하고 재촉했으나 아빠가 말을 듣지 않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가족은 얼마 후 충돌 사고가 난 차량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무리한 추월 경쟁을 하다가 사고가 난 것입니다. 만일 아빠가 딸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것은 기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나타나지 않을 때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방법과 결과가 우리의 요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혼란이 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응답을 유보하시거나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자하는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가장 큰 유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바심을 내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시편 기자는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질서를 깨뜨리시지 않고, 조화로운 섭리 속에서, 택하신 성도의 합당한 기도에 응답하시고, 성도와 교회를 보존하시고, 그 작정하신 뜻대로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어떤 이들, 특히 자연주의자들은, 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합니다. 즉, 하나님은 사소한 개인의 기도까지 관심을 두실 수 없으며, 자연의 법칙들이 있는데, 어찌 한 개인의 기도에 그 법칙들을 바꾸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간절히 생각하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생각, 자기 멋, 자기 욕심대로 살아갑니다. 이웃을 돌아보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기도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는, 우리에게는 아뢰고 부르짖을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린 아이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국민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정부가 있습니다. 학생들의 호기심에 대답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르짖고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만 동시에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에 가서 아뢰고 부르짖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상에게 가서 아룁니다. 그러나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뢰고 부르짖을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야말로 크고 놀라운 감사입니다.

 

둘째는, 아뢰고 부르짖을 성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윗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특별히 기도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성전을 찾습니다. 찬양하고 싶을 때 하나님의 성전을 찾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의 시간이 성전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정해진 곳에서 만나는 만남도 있습니다. 특히 정해진 곳에서 만나는 만남이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마음을 생기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부르짖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부르짖음을 귀로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청각은 온 세계의 모든 소리,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다 들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의 소리까지라도 들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선한고 아름답고 복된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4.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시 18:30)

찬송 : 411장(아 내 맘속에)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편 18편 30절 말씀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외워 가슴에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리쳐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이시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이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영원히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셔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장하시고 책임져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점점 내 안에 쌓여가는 사람이 큰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이 점점 쌓아져 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방패로 삼고 계십니까? 돈을 방패로 삼고 계십니까, 직장을 방패로 삼고 계십니까, 남편을 방패로 삼고 계십니까, 자식을 방패로 삼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을 방패로 삼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에게 영원히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는 방패가 되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자는 하나님이 무장을 해제시켜 버립니다. 모든 도와주던 것을 중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피하는 자,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방패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 승리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살아 역사하시면서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

누구를 막론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산통이 깨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활이 엉망진창이 된다든지, 꼬일대로 꼬일 때는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 무너지더라도 살아나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만은 안 무너지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살아계신 내 주가 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회복됩니다. '살아계신 내 주가 계신데 나는 왜 이렇게 무너졌어'가 아니라, '이런 때에도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내 주가 계신다' 를 아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살 희망까지 없어져 버릴 때, 이불 뒤집어쓰고 며칠씩 있으면 딱 좋겠고, 차라리 눈 딱 감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그 때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절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님이 계십니다.

 

2. 피하는 자의 방패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가만히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위해 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누군가 위기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위기를 넘기는지를 보지 않습니다. 그의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돕고 계신지를 봅니다. 하나님은 그가 누구든지 그를 위해서 반드시 일하고 계십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문제 안에 거하게 됩니다. 자기가 일하고 돌아다닙니다. 그 때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님"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을 가슴 깊이 묻고 살 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 말씀으로 방패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전쟁에서 방패가 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럼으로 원수들과 싸울 때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주심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싸울 때, 원수들의 뒤를 쫓아가되 원수가 완전히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게 하심으로 악한 것은 그 모양이라도 살아남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거하시는 능력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나아갈 때, 원수들을 쳐서 아무도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내 발 아래 엎드러지게 하심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이기지 못하고 엎드러지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의지하며 전쟁에 나가면, 능력으로 내게 띠를 띠워 주심으로 나를 치는 자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하심으로 원수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적전쟁에서는 오직 말씀만이 승리의 방패요 무기라고 믿고 말씀을 늘 붙잡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함으로 넉넉히 승리하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5. 말씀의 위력(시 19:7-8)

찬송 : 91장(슬픈 마음 있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위력을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1945년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입니까? 지금은 그것보다 몇 백, 몇 천배 강한 폭탄이 있습니다. 그 폭탄이 사람의 육신을 망가뜨리고, 생명을 해합니다. 그것은 죄악의 폭탄입니다. 사단이 구사하는 가장 강력한 폭탄입니다. 이 폭탄은 사람을 게으르게 합니다. 사람을 모순되게 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포악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남의 약점과 단점만 보고 비난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사람을 더 모나게 만들고 어지럽히고 분노의 나락으로 빠지게 합니다.

폐허가 된 도시도 시간이 지나면 복구됩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복구시키기 위해 건설을 합니다. 황폐화된 사람의 마음도 시간이 되면 자연치유가 됩니다. 역해진 몸도 음식을 잘 섭취하고 운동하며 회복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죄악으로 인하여 황폐와 되었다면 무엇으로 고쳐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수술하는 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양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감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는 지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소성시킵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병든 영혼이 말씀을 듣고 살아납니다. 의기소침하여 우울증에 빠진 영혼이 말씀을 듣고 삶이 전환됩니다. 취미생활의 기분전환은 잠시입니다. 이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한 삶의 전환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영혼을 고치는 이유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마치 신선한 공기를 마신 것과도 같은 상쾌함을 경험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개조시킵니다. 죄악된 본성에서 의의 성품으로 바뀌어 집니다. 말씀을 듣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습니다. 말씀은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합니다. 말씀은 위력이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둔한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책이 있습니까? 반면에 자신의 지혜로움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혜의 근원이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지혜의 근원입니다. 말씀은 사람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가르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2:13).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경외함이 지혜입니다(욥 28:28). 말씀으로부터 지혜를 찾으십시오. 말씀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확실한 말씀 앞에서는 지혜롭게 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혜로워진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순간 우리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우리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축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합니다. 주의 말씀이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요 17:17). 진리의 말씀을 듣고 나면 무한한 기쁨이 찾아옵니다. 말씀이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담겨 있습니다. 그 축복이 우리 것임을 증거 합니다. 어찌 기쁘지 않습니까?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눈을 밝게 합니다. 눈은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눈은 일차적으로 가깝고 먼 것에 대한 판단, 크고 작음에 대한 판단, 모양과 색깔에 대한 판단을 합니다. 눈이 밝으면 이런 판단이 어두운 사람보다 쉽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몸의 등불과도 같습니다(마 6:22).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 영혼의 눈도 있습니다. 이 눈은 진리를 분별하는 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순결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고 바른 것을 보는 눈, 옳은 것을 바라보게 하는 혜안은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순결한 말씀을 아는 사람이 순결한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를 소성시키고, 지혜롭게 하며,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는 은혜가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6. 응답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시 20:5-6)

찬송 :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

 

마틴 부버는 “나와 너” 라는 책에서 두 가지 인간관계의 유형 곧 인격적인 인간관계와 비인격적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격적 인간관계란 서로 상대방의 인격을 인정해 주고 사랑과 신뢰를 가지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한편 비인격적 관계는 상대방을 이용가치나 상품가치로 취급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서로에 대해 필요성이 사라질 때 즉시 헤어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깨어질 가능성을 가진 비인격적 인간관계를 경험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연약합니다. 비인격적 인간관계를 인격적 인간관계로 승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3의 중재자 곧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마틴 부버의 이 제안은 시편 20편의 빛 아래서 보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너’의 관계를 경험합니다. 정치판에서는 ‘나와 너’가 없습니다. ‘나와 그것’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도외시한 인간, 하나님을 배제한 집단에서의 인간관계는 인격적 관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비인격적 인간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특히 정치를 사기술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일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산다고 합니다. 그들의 미덕은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도 일종의 피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나빠도 웃으면서 허리를 굽혀 ‘하이’를 남발합니다. 반면에 미국 아이들은 이웃을 도와주라는 말을 자주 듣고 산다고 합니다. 그들의 미덕은 이웃을 돕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사활동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이웃을 돕는 일이라면 조금씩 자주 기부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양보와 봉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랍니다. 봉사조차도 점수로 평가하는 세상이니 이 땅의 이웃은 영원히 그 수준에 머물고 말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너’는 어떤 사람일까요? 환란을 당할 수 있는 약한 인간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너’는 하나님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찾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우심의 은혜, 붙들림의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인 사람을 말합니다. ‘너’의 축복을 보는 ‘나’는 즐겁기 한량없습니다. ‘나’의 공동체 곧 ‘우리’는 ‘너’의 축복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의 잘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리니”(5절a) ‘우리’는 여전히 ‘너’를 축복한다고 합니다. ‘너’의 기도를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너’에게 복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5절b) ‘너’를 향한 축복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너와 나’ 사이에 중재자 하나님이 계십니다. ‘너’는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너입니다.

‘너’는 ‘나’ 자신이며, 자아입니다. ‘너’는 ‘나’의 거울입니다. 거울보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자기를 향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너에게 저주를 퍼부을 수 없습니다. 축복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너는 타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타인은 나와 같은 타인입니다. 너와 나는 마음이 통해 있습니다. ‘너와 나’는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타인를 향한 언행이 내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똑 같이 돌아옵니다. 자비를 베풀면 자비로 돌아오고, 원수를 갚으면 원수 갚음으로 돌아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가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너와 나’의 관계, 우리 공동체 안에 계십니다.

 

공동체의 일원인 내가 공동체의 형제들을 향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형제를 ‘너’로 삼는 축복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오른 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6절b) 여기 구원이란 승리를 말합니다. 승리는 전쟁의 목표입니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공동체의 바램입니다. 공동체가 배우는 것은 서로 ‘너’를 향해 축복하는 일이 됩니다. 만약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해 축복하지 않는다면, ‘나와 너’의 관계가 깨질 위험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왕을 배제하는 일입니다. ‘너’를 ‘그것’으로 삼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와 너’는 서로 축복을 주고받는 일어서야 할 사람들이다. 나와 너가 하나 되는 그 자리에 축복의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나는 너를 생각하면 그 분은 축복을 수기기 위해서 함께하심을 믿고 나보다 너를 생각하는 2011년이 되어 응답의 복을 받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67. 메시야의 고난과 승리(시 22:25-26)

찬송 : 505장(온 세상 위하여)

 

어려움을 겪어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왠지 슬픔과 우수에 찬 그 노래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실제로 노래하는 사람들 중에서 엄청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 때 고통과 어려움을 심하게 겪은 적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는 대학교에서 졸업할 수 없어서 피신하듯이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에서 피나는 노력으로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되었습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어쩐지 인생의 깊음이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대중가수 비도 한 때 어머니를 여의고 먹을 것, 잠잘 곳, 입을 것이 부족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못 생겼기 때문에 가수 하면 안 된다고 함에도 다른 가수의 뒤에서 춤으로 받쳐주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가 어머니와의 약속을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감동합니다. 이처럼 고통을 겪은 다음에 엄청난 결과를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도 고통을 노래하고, 고통이 끝난 이후에도 고통을 기억하며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도 고통을 노래하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상태가 비참하여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불신자는 삶을 스스로 마감하기도 하고, 원수를 갚기도 합니다. 혹은 인생이 덧없고 모든 일이 부질없는 짓이라며 산 속으로 숨어버리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통을 이깁니다. 그 와중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축복이 어던 것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나에게 찬송을 주시는 분입니다. 시인이 사람들 앞에서 찬송합니다. 사실 찬송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 중에 노래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고통이 노래할 마음을 뺏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통 중에 노래하는 것이 실제로 노래다워집니다. 시인은 자신이 회중들 앞에서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찬송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중에도 찬송하는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경외할 분이십니다. 시인의 앞에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되고 보니 주를 경외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숨었고, 사렙다로 도망하였을 때는 엘리야 혼자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갈멜산 승리 이후 이세셀의 눈을 피해 호렙산으로 숨었을 때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절하지 않은 사라미 칠천 명을 남겨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앞에서 서원을 갚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갚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만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복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찾아야 할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할 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찾음을 반가워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영과 육의 양식을 주어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심으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사는 축복 즉 영생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워도 노래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송하게 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경외를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경외해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은 찾아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심으로 본문에 나타난 배부름의 축복, 영생의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8.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3)

찬송 : 292장(주 없이 살 수 없네)

 

어느 글에서 보았던 내용입니다.

"따르릉~~따르릉~~" 토요일 오후에 주보를 맡겼던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목사님 주신 내용 중에 주일 오전 어린이 집회 설교 제목이 빠졌더군요? 설교제목 좀 알려주십시오." "그렇습니까? 제목은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입니다." 이상하다는 듯이... 평소에 설교제목을 길게 쓰시던 목사님이었기에 한 번 더 인쇄소 직원은 물어 보았다. "그것 외에 또 있습니까?"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목사님은 약간 늦게 도착하셔서 어제 준비한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서서 시작하려는데 설교제목이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어딘가에 크게 충격을 받으신 것처럼, 목사님은 계속 이 제목을 몇 번씩 되 뇌이고 계셨습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목사님은 눈물이 계속 흘러 더 이상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시편 23편은 다른 시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암송되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성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많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가 서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매우 적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가 목자”라는 말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목자라는 것은 우리가 그의 “양”이라는 사실과 같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특성을 나타내주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구절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목자로 비유된 것이 무려 80회나 있습니다.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스라엘에서 푸른 초원과 물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목자는 항상 양들에게 이러한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먹어야 할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실족치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이는 목자가 양의 필요한 것을 알고 채워주듯,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시고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막대기와 지팡이로 보호하십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는 길 잃은 양떼를 보호하거나 인도하거나 몸을 의지하는 데 쓰이는 것을 지칭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 줍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러한 두려움을 만나고 때로는 공포에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은 사망의 음침한 두려움이 있다 해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푸른 초원이 있는가 하면 고원이 있기도 합니다. 선한 목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풀들을 가려주어야 합니다. 저녁에는 양들 하나하나를 살펴야 하며, 그 중에 다치거나 머리가 깨진 양들에게는 기름을 부어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푸른 초원을 선택하시고,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에게 치료를 해주십니다.

 

좋은 목자는 양들과 함께 합니다. 즉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반면에 삯군은 목자도 아니며, 제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의 양들에게 풍성한 삶을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양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 삯군 목자는 양이 위험을 당해도 이러다 말겠지 하며 안심합니다. 정작 양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자기는 살겠노라고 도망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위 위험을 감지하고 미리 대비합니다. 잠도 자지 않습니다. 짐승의 공격에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양의 생명을 지킵니다. 양의 생명이 곧 목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양 우리 안에 있을 때 안전하며 양육을 받게 됩니다. 즉, 우리 안에 있을 때 양들은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에 있을 때 지치고 상처받았던 영혼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아울러 풍성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같이 어리석게 하나님의 품을 떠났으나 그는 목자같이 오늘도 잃은 양을 찾으시고 돌보시며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뭔가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고 고민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목사님처럼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69.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니(시 23:4)

찬송 : 488장(이 몸의 소망 무언가)

 

양들은 자기를 지키는 목자와 아닌 사람을 기가 막히게 구별한답니다. 어떤 사람이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을 한 채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목자는 다른 목동을 따르지 않는답니다. 다만 건강하지 않은 양은 다른 목동의 말을 듣고 따라간답니다. 그리스도인도 믿음에서 병들고 약해지면, 그들을 찾아오는 아무 선생이나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이런 저런 영적인 병에 걸리다 보니 예수님이 아닌 다른 목자를 따르는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는 예수님을 참 목자가 아닌 것으로 착각합니다.

 

양은 자기를 알고 있는 목자를 따릅니다. 우리에게서 참 목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며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 됨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목자되심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믿음의 담긴 노래입니다. 다윗은 이 노래처럼 살았습니다. 수많은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더 많이 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이 누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살면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세월을 지낼 수도 있습니다. 다윗도 고통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사울의 위협을 피해서 쫓겨 다닌 적도 있었고,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자신의 몸을 잠시 의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상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목자가 되어주셔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위기 중에 있는 믿음의 사람에게 개입하십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걱정할 일이 많지만, 실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로 해결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의 할 일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안위하십니다. 여기 안위하신다는 말은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을 보호하십니다. 마치 목자가 양을 짐승의 공격에서 보호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사단이 아무리 공격해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공격에 넘어지는 것처럼 보일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일까요? 우리가 사단의 공격인지 모르고 따라갈 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고 다른 데로 갈 때입니다. 양은 자신의 의지가 없어서 본능적으로 목자를 따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어서 악한 것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선한 것을 따르는 데는 미적미적하다가도 악한 것을 따르는 데는 매우 재빠릅니다. 이러한 것이 자연인의 속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십니다. 우리를 사단의 세력과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말씀의 검과 성령의 검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검으로 무장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성령의 검이 있습니다. 강력한 방어의 무기인 믿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에게 승리를 위해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무장시키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막대기와 지팡이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서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곧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경험됩니다. 이러한 은혜와 믿음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70. 경쟁보다는 공존을(시 25:4-5)

찬송 : 430장(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요즘 세상은 경쟁사회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정의가 된다고 믿습니다. "경쟁"은 결국 이 세계를 망하게 한다고 합니다. 세계가 무한 경쟁으로 들어가게 되면 세계 인구의 20%는 경쟁에서 이겨 혜택을 보게 되지만, 나머지 80%는 고통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쟁에 대해서 철저히 대비하지만 먼저 이것을 싸움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고 협력해 나가는 방법을 찾고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특히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종말에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에 더욱 사랑의 불을 지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어에는 경쟁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협력" "조화" "일치"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세계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으로 몰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경쟁과 싸움의 이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전해주는 경쟁에서의 지혜는 과연 무엇일까요?

 

1. 경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툼과 경쟁의 문제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형제들 간에도 간혹 다투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건 간에, 누가 원인을 어떻게 제공했던 간에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든 사람의 관계, 특별히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권위를 빼앗았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를 들어 죽이려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사단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가정,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넘어뜨릴까 싶어 그 틈바구니를 노리고 비집고 들어옵니다. 여기에 이용당함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를 물고, 물며, 죽이고 일어서려고 할 것입니다만 우리 믿는 사람들 간에 있는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아픔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함께 회개하고 살피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지를 반성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온유한 마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경쟁보다는 겸손과 온유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골육"이라는 말은 "형제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람과 롯은 3촌간입니다. 롯은 아브람의 손아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지금 롯을 자기와 동일한 위상으로 격상시켜 형제 사이와 같은 친밀함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고 하소연합니다. "다투게 말자"고합니다. "청컨대, 제발 우리가 서로 다투지 않도록 하자"고 간곡하게 청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어떤 권위에서 기득권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삼촌이고,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명령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감정보다는 조카 롯의 인격을 존중해 주면서 먼저 롯에게 청합니다. 우리도 어떠한 문제, 사건을 볼 때는 침착함이 필요합니다. 감정적인 대응 감정적인 판단은 금물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싸움에 싸움이 될 뿐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지 날마다 반성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3. 경쟁보다 화합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는 사람들 간의 다툼과 싸움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나와 조카 롯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서 물과 초지를 찾고 경작할 땅을 얻어야 겠구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인가?" "내가 하는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높이고 나타낼 것인가?" 이것을 생각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6)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중심을 두기 때문에 의로운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지 않을 때 문제는 꼬이고, 더 힘들어집니다. 문제 해결이 열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온유와 겸손으로 이제 그 문제를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경쟁보다 공존의 마음으로 섬기면 살아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누리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71. 하나님이 누구신가?(시 27:1)

찬송 : 359장(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배워갑니다. 조직신학의 신론에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 전지하신 분,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신 분, 어디에나 계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에는 이것을 믿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자리만 차지하는 분, 아무 것도 알지 못해 사람에게서 왕따를 당하는 분으로 치부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적도 있었고, 하나님의 권위와 인격을 무시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소위 말하여 많이 배웠다는 분들이 이러한 일을 하였습니다. 많이 배웠고 많이 알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으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인격적인 경험이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바르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믿는 것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합니다. 마치 캄캄한 밤에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정합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계획은 계획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계획을 축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하여도 그 길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빛이십니다. 하나님이 어두운 길을 가는 우리 앞에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 빛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나아갈 방향이 생기는 빛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으며 천국을 향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빛이신 하나님,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게시니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둘째, 하나님은 우리 구원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영혼들을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은혜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경험한 적이 많았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튼 구원은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다윗도 범죄한 적이 있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치시고 죽음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왕위를 유지하게 하시고,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왕권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시는 데 믿음의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사람 안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것은 몸과 신체의 각 기관의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 활동이란 곧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신체기관이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것을 질병이라고 말합니다. 질병이 심해지면 여러 기관에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는 곧 죽음입니다. 우리의 몸에서 혼이 떠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영적 죽음도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어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면 진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야 진짜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능력이 되어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을 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데 우리가 무엇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우리를 해치는 어떤 것이라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과 구원이시며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나와 우리에게 먼저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일이나 무서워 할 일을 만나도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러한 은ㅁ혜로 올 한 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72. 잠깐의 노염과 평생의 은총(시 30:4-5)

찬송 : 293장(주의 사랑 비칠 때에)

 

시편 30편은 성전 낙성가라고도 합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고, 수많은 장애물도 하나님이 모두 해결하시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성전에 임할 영광이 보이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영광을 보여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고통이 있으나, 아침은 기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취의 아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절). 우리가 겪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잘못이 있으면 즉시 회개하여 잠깐의 노여움을 해결받고 연원한 하늘 은혜를 누리고사는 2011년이 되는 비결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찬송하며 감사하라

‘성도들‘ 은 히브리어로 ’하시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을 받고, 또 하나님의 신실 되게 사랑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모든 성도들에게도 공히 해당되는 명칭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서 ‘거룩한 무리’가 있습니다. 이는 언어와 생각과 행동이 거룩하게 구별된 무리들의 집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는 명칭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만큼 일상생활에도 신중을 기하고 스스로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에서 ‘이름’이란 뜻으로 사용된 ‘제케르’는 ‘기념’, ‘기억된 것’이란 의미입니다. 곧 성도들이 삶 속에서 체험하여 깨달아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과 그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 할 것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보살피심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삶은 더욱 힘차고 신선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됩니다.

 

 

2. 노여움은 잠간이요 은혜는 평생

‘노여움’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은총’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죄와 허물 때문에 진노하시사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깐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길거나 비참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징계 자체가 미움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를 전재로 한 것이기에 잠간 동안 그들에게 임할 뿐입니다. 자신의 죄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한없는 자비와 은총을 풀어 주시어 진노로 인하여 슬픔과 고통을 당한 자녀들을 위로하십니다. 이는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저주에서도 깨달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순종하는 자에게는 그의 축복이 천대를 이어가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삼사대에 이르게 하십니다. 축복과 저주의 기간이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3. 성도에게 아침과 저녁

밤은 고통과 절망과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기나긴 밤은 두려움에 뼈가 떨리는 시간이지만, 그 밤이 지나면 찬란한 아침이 눈부시게 찾아오듯이, 죄악과 불의로 인한 고통은 밤과 같이 절망적이고 슬픔의 시간이지만, 회개한 이에게 주시는 은혜에 따르는 기쁨과 평강은 아침 햇살보다 더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감추지 말고 즉시 회개하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말씀을 하루가 시작될 때 하루가 끝날 때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 힘을 얻어 누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화는 철저한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거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화를 내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그 노여움을 거두시고 평생 사랑으로 감싸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과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꾸준히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73. 인자하신 하나님(시 31:7-8)

찬송 : 304장(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에 대한 욕심도 끝이 없고, 지식에 대한 열정도 끝이 없습니다. 게다가 권력에 대한 집착도 끝이 없습니다. 재물, 지식, 권력 등이 자기를 즐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지면 즐겁고, 누리면 즐겁습니다. 알면 즐겁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피곤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런 것들을 다 누려보았어도 헛되다고 회상합니다. 이런 즐거움들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궁극적이고 영원한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궁극적이고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어야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궁극적이고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은혜가 영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성전 낙성가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입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인자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잘못할 때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이것도 인자함입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과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이 무관심할 것입니다. 책망 받는 것도 인자함의 대상이 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의 고난을 보고 계십니다. 다윗은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또는 사람들로부터 믿음에 대한 조롱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는 듯한 말을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환경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하는 일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되 유심히 자세히 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을 도우시려고 우리들의 가는 길을 인도하시려고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들을 보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을 알고 계십니다. 다윗은 환란 중에 있는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사람의 영혼을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짐작만 할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상태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하면 지치고 피곤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알고 계시는 이유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만약 원수의 손에 잡히고 갇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윗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한 때 블레셋 왕 아기스의 손에 의탁할 때도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셔서 빠져나오게 하셨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자유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세워가도록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넷째, 하나님이 우리의 발을 넓은 곳에 세우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발을 넓은 곳으로 세웠다고 말합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활동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여부스 성을 점령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온 산성으로 만들고 그곳에서 왕국을 세워가는 다윗의 일에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자유와 활동의 복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의 자유를 갖는 것, 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자유롭게 계획하고 추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고 믿고 즐거워합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들과 교회와 가정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가득하여 즐거움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74. 고통 속에서도 주만 바라보는 사람(시 31:19)

찬송 : 569장(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미국에서 냉동음식 관련 사업을 하며 훌륭한 요리책과 강습회를 인도하는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부인이 처음에는 평범한 음식점을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눈이 멀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있어 전혀 보지 못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자동차 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암흑의 세계에서 홀로 남아 수 주간을 멍한 상태에서 실신한 사람처럼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부인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몇 일간을 밥도 먹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부인은 크고 강한 손이 자기를 붙잡아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은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의 부정적 생각이 적극적 생각으로, 비관하던 자리에서 낙관의 자리로, 원망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강한 신앙의 경험은 그의 슬픔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상처 입은 것은 크게 생각하는데 내가 상처 주는 것은 생각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태어난 지 7개월밖에 안된 어린 꼬마의 이마를 보니까 온통 머리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왜 이러느냐고?" 했더니 엄마가 하는 이야기가 "지금 한참 기는 연습을 하는데 신이 나가지고 한참 기어가다가 여기서 박고 저기서 박아 가지고 멍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상처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상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 상처를 어떻게 대처해나가는 태도가 어떤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안에는 우리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은 또 한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어떤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그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망하고 회피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 고난을 달게 받겠다는 마음이 들어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우리가 고난이 올 때 고난 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보자기에 쌓아진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대로 해석하자면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쌓아진 보자기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난밖에 안 보이지만 그러나 그 고난 속에는 깊으신 하나님의 비밀의 의미가 있고 큰 상급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런 안목이 있습니다.

구약의 지성소는 아무도 갈 수 없고 거기는 불도 켜놓을 수 없는 가장 캄캄한 곳이었습니다. 지성소 즉, 성전은 불을 밝히지만 지성소에는 등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고난의 비밀 속에 고난의 감추어진 보자기 속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은밀한 곳이 있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난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통만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물의 골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가니 넓은 길이 있더라는 겁니다. 고통이 지나가면 험악한 산을 올라가면 넓은 평야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닥쳐도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보는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고난 속에도 찬송하고 고난 속에도 감사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 가진 특기입니다. 장기입니다. 자랑거리입니다. 그런 사람은 늘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이 쓰는 말 가운데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언어가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사랑과 감사'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언어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까지 감동시키는 언어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터득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까?

그렇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 사람에게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담대하십시오. 자기에게 다짐한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고 기쁨을 전하고 감사를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웃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을 사랑하십시오. 세상을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담대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고통스러우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하실지라도 나는 주만 의뢰하고 나는 주의 얼굴을 뵙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분은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고난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75. 은신처 되신 하나님(시 32:7)

찬송 : 337장(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크게 잘못하여서 어쩔 줄을 몰라 전전긍긍한 적이 있었습니까? 사실 전전긍긍하는 것은 자기 잘못 때문보다는 그 여파로 인해 당할 수치심과 손해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끼시는 그릇을 깼다고 합니다. 깨진 그릇을 대충 치워놓고 시치미를 뚝 떼지만 엄마에게 들킬까봐 걱정입니다. 만약 엄마에게 들켰다고 합시다. 크게 혼날 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웬일인지 별로 크게 혼을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자 걱정하느라고 힘들었겠다며 위로를 합니다. 혹시 그릇을 치우면서 다친 데는 없느냐고 자상하게 묻습니다. 아이가 울면서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용서해 주어서 고맙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엄마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아이에게 이렇게 한 번 하면 아이는 자라서도 엄마의 인자함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 자기 자식들에게도 엄마의 인자함을 본받아 인자하게 행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임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 너무 큰 데도 하나님이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잘못을 회개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침상을 적실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시고 다윗의 왕국을 지속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나가 잘못을 모두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나가서 허물을 아뢸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수치스러울 우리의 일도 하나님이 감사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십니다. 오늘 다윗의 노래를 보면서 하나님의 감싸주심을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은 은신처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은신처라고 고백합니다. 어려운 일을 피하는 은신처, 수치스러운 일을 감출 수 있는 은신처, 허물을 숨겨둘 수 있는 은신처입니다. 다른 데 숨기면 용서를 못 받겠지만 하나님께 숨기면 용서를 받습니다. 죄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죄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신처가 됩니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공격을 막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서는 일입니다.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은신처가 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없이 평안함을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환란에서 보호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도 고난을 당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도 고난을 당합니다. 악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은 죄의 대가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은 환란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환란을 당합니다. 믿는 일이 선한 일입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힘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사용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자기들이 믿는 우상에 절하지 아니한다고 위해를 가합니다. 교회 역사상 이런 일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순교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란에서 보호하신답니다. 비록 순교자들이 있어도 믿음의 씨앗이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믿음의 승리를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구원의 노래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숨기시고 환란에서 구원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노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가 우리 입과 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 노래가 우리 환경에서 매일같이 들립니다. 그 노래가 늘 우리를 감쌉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크고 놀랍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찬양하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구원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역시 그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의 노래가 온 땅에 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인자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우리 안에 감사가 넘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은신처입니다. 하나님이 환란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러한 은혜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신처되시는 축복이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여 구원의 노래를 기뻐 부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76.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는 사람(시 34:7-9)

찬송 :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 아브라함으로부터 복이 나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만나는 사람이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이 받는 복이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복을 약속받은 사람보다 약속하신 하나님이 더 권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복이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는 복입니다. 하나님 안에 복이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에 복이 임합니다. 복된 사람은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집니다. 인간은 배신해도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돌봐주시고 복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배신의 쓴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배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거의가 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배신당한 경험으로 말하면 다윗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울 왕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아기스 왕으로부터도 서운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충성스런 부하들이 그를 배신하였고, 심지어는 아들로부터도 배신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권력이 좋고, 왕으로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살았지만, 다윗이 인간으로부터 당한 배신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배신당할 때마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영원히 배신하지 않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배신을 밥먹듯 하지만 하나님을 결코 그렇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복을 주시고 배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선하심을 맛보면서 사는 2011년이 되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선하심을 맛보면서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참고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무서운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벌벌 떨고, 무서워하며 죄책감으로 지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책감을 떨쳐 버리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십시오. 이것이 선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영혼 깊이 느끼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십시오. 맛있는 음식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면 걱정 근심을 떨치고, 즐거움을 알게 됩니다.

 

2. 여호와께 피하는 생활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갑자기 폭우가 내리면 피난처를 찾습니다. 위험한 곳에 머물러 있다가 화를 당합니다. 안전한 곳을 찾아야 삽니다. 지난 해 수해와 태풍 때 야영객들이 경찰의 말을 무시하고 개울가에 머물러 있다가 화를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피난처가 어디입니까? 우리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피난처입니다(시 46:1).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대피하거나, 경찰의 말을 듣고 대피한 사람은 안전합니다. 이 안전이 곧 복입니다. 하나님께 피한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 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1~2).

 

3.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이 있어야 복을 받습니다.

경외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동시에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권위와 친밀함은 반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시에 지니신 성품입니다. 권위만 생각하면 먼 데 게신 하나님입니다. 친밀함만 생각하면 가까이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 데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 가까이에도 계십니다(렘23:23). 하나님은 경외하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목자가 양에게 부족함이 없이 지켜주는 것처럼(시 23:1), 하나님이 우리에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경외하는 우리가 믿고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 경외하는 사람이 받는 축복입니다. 믿고 구하여 복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77. 하나님의 관심(시 34:15-17)

찬송 : 401장(주의 곁에 있을 때)

 

사람마다 관심사가 있습니다. 관심사를 살려서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직업과는 달리 취미로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관심사를 잘 이용하면 삶이 건강해집니다.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가 없으며, 즐겁게 삽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건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심사를 바르게 이용해야 합니다. 건전한 관심에 건강한 삶이 따라옵니다. 반면에 불건전한 관심은 삶을 황폐하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향하여 어떻게든지 나쁜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게 합니다. 우리 인생을 멍들게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격, 신앙, 속사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요한 1:47) 하시면서 그 속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는 외모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여자들뿐 아니라 요즘은 남자들도 성형수술을 좋아하고 남성용 화장품도 불티나게 팔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외모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모에 투자하는 것 이상으로 속사람과 신앙을 위해서도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믿음의 부유함 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관심을 봅시다.

 

첫째,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십니다. 우리의 눈은 관심을 가진 것을 향합니다. 자기의 의지나 결심과는 다르게 자동적으로 눈이 향합니다.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좋은 건축물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발길을 멈춥니다. 자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멋진 경치와 신비한 자연의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다닙니다. 사람은 관심을 가진 것을 더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향하여 관심을 가지십니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보이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의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벧전 3:12). 의인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귀는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부스럭 소리를 듣고 깹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도 듣지 못하고 잠을 잡니다. 관심사의 차이일수도 있고, 성격상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는 잠을 자다가도 자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관심이 있으면 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귀는 사람의 귀와 다릅니다. 사람은 단순히 의미 없이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들으십니다. 아기의 울음을 듣고 아기의 감정을 감지하는 엄마보다 더 정확하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듣고 우리의 심정을 아십니다. 특히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 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렘 33:3)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부르짖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출 3:9). 신앙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당연합니다. 부르짖으십시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약 5:16).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의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당당히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가도록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얼굴은 정의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심으로 악한 사람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환란을 간하는 의인들을 건져주십니다. 한두 가지 환란이 아닌 모든 환란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정의와 평화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 의를 이루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들을 향하여 관심을 갖고 계시며 그들의 계획의 선함을 알고 계시며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 그렇게 되면 좋으련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환란에서 건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바라보심과 들으심으로 인한 은혜가 충만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을 이루어드리는 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78. 마음의 상처도 만져 주시는 하나님(시 34:18-19)

찬송 : 315장(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이 세상은 마치 걱정 근시의 전시장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아서 걱정하거나 시험에 낙방해서 낙심하는 학생, 질병으로 고통당하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몸부림치는 환자,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으로 고통과 허무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의식에 빠져서 고민하는 사람, 열등감에 빠진 사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실연당한 사람, 배신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고민은 천태만상이요, 각양각색입니다. 각자 나름대로 고민과 고통이 있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나는 전혀 상처를 받지 않고 삽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어렵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마음도 치료를 받으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발전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2011년에는 상한 마음도 만져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사는 한 해를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마음이 깨졌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브로큰 하트(broken heart)’라고 하는데, 마음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뜻합니다. 마치 큰 쇳덩어리나 망치로 바위를 내리쳤을 때 바위가 부서지듯이, 마음이 부서지고 깨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마음의 고통이 우리를 괴롭힐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위대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조개에서 진주가 생기는 법입니다. 인생에서, 가정이나 사업에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했다고 반드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 나가면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자’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자를 말합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도와주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절망하여 자살까지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눈물만 흘려도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치료의 광선을 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고난 받는 자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의인은 고난(苦難)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 제멋대로 남에게 악을 행하고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죄짓지 않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자 할 때 더 고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고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죄가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오면 구원과 은총을 베푸시고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한 고난에서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실패하는 것 같으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망하는 것 같으나 망하지 않습니다. 죽는 것 같으나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면, 반드시 보호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치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201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79.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시 34:19-20)

찬송 : 285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신앙생활을 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불확실한 믿음 때문입니다. 세상이 불확실해지는 데, 사람은 확실한 것을 좋아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기 확신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유혹은 너무 강하고 확실해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기에 매우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신앙은 나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고 무너지며,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보다는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에 붙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실한 믿음, 강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고 강한 믿음을 갖도록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갖게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경험입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거절할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는 믿음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신앙의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에 대한 경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더 많이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묵상하는 사람에게서 경험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험시켜주시는 것은 우리의 생활 중에서 신앙과 관련되어 잇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이 의인을 모든 고난에서 건지십니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인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의인의 고난을 건져주심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의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게 합니다. 다른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의인을 향하여 일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이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의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 깊이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게 함입니다. 의인에게 더 큰 영광이 나타나게 하려 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이 장차 올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롬 8:18). 하나님은 의인의 고난에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건져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한 의인들 곧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혹시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뼈를 보호하십니다. 사람의 뼈는 직립보행을 할 수 있도록 지탱해 줍니다. 사람이 활동하고 일할 수 있는 것은 뼈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되면 벼가 약해져서 작은 충격에도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집니다. 그러면 병원에 가서 기브스를 하고 몇 달 동안 지내야 하는데 얼마나 가렵고 불편한지 모릅니다. 여기 뼈를 보호하신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사람의 뼈가 될 수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 삶의 기반이 되고,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건강, 가족, 믿음, 관계, 성숙, 부유함, 평화 등 우리에게서 빼 놓을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요소들을 건강하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균형적으로 발전하게 하십니다.

 

셋째, 하나라도 꺾이지 않게 하십니다. 뼈가 부러진 사람들의 고통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알 겁니다. 손가락뼈 하나만 꺾여도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해야 하고 손가락 기브스를 하고 몇 달 동안 지내야 합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 같지만 작은 고통 하나라도 참기 어렵습니다. 손가락 끝에 가시 하나 찔려도 아프고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대단한 것 같지만 이렇게 작은 일에도 아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뼈를 하나도 꺾이지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전한 건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의인에게 온전한 건강을 주십니다. 의를 행하며 당했던 고난과 아픔을 하나님이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건강, 전인적 건강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앞에 뼈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는 믿음, 건강, 가족, 관계, 직장, 이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결격 사유가 있으면 생활에 지장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도 부족하지 않게 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균형 잡히고 온전한 건강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의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온전하고 균형 잡힌 전인적 건강을 허락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 곧 의인들에게 이런 건강을 주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확실합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온전한 건강으로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80. 만사형통의 복(시 35:27-28)

찬송 : 302장(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만사형통의 복은 세상적인 좋은 것들이 없을지라도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가난하고 몸이 불구인 자들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기쁨과 만족 가운데 살게 됩니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비록 건강치 못하더라도, 용모가 보통 이하라도 절대로 신세한탄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복과 기쁨은 돈 많고 건강하다고 얼굴 예쁘다고 주어지는 게 절대 아닙니다. 내 안에 하나님께서 계셔서 나의 모든 것이 되어주실 때, 내가 하나님의 소중한 보물이 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서 ‘나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행복한 자가 됩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재물의 양이 적을지라도, 여러분에게 인간적 장점의 수효가 적을지라도, 여러분에게 세상적 도움의 수단이 적을지라도, 그럴수록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만 한다면 부족함이 전혀 없는 자(시 23:1)가 됩니다.

 

1. 만사형통의 복은 어떤 복일까요?

매사가 굴곡이 있고 안전한 지대에서 살 때 우리는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전’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보내셔서 수비하시고 높여 주심으로 막강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형통은 옳다, 적당하다, 유익하다, 번영하다, 형통하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는 일에 옳다고 인정하셔서 가장 적당한 유익을 주시고 번영하게 되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결국 그 사람의 계략에 걸려 이용만 당하고 패가망신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안전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요세시요, 산성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가 되십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하며 사는 의인은 견고한 망대가 되시는 주의 이름 아래서 안전함을 얻게 됩니다.

 

 

2. 만사형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우리는 먼저 하나님은 형통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세우신 지도자 다윗의 불행을 좋아하며 우쭐대는 자들에게 창피스러운 수치와 치욕이 떨어져 뒤집어쓰게 되지만 웃음과 환성은 다윗을 의롭게 하시고 죄 없다 하심을 즐거워하는 자에게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즐거운 노래와 감사 찬송은 하나님의 종 다윗의 형통을 기뻐하면서 하나님 여호와를 높고 위대하시다고 신앙을 고백하는 말을 하는 자에게 항상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한 치욕과 수치스러운 창피를 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고 멸시하십시오. 안전하고 형통하여 기뻐하며 즐거운 노래를 부르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사랑하여 형통케 하는 자를 사랑하면서 그 종들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3. 만사형통의 비결은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형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는 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명하여 보낸 일에도 형통을 이루어 내는 형통한 말씀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사55:11)그러므로 안전하고 형통한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성전(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의 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수고한대로 얻어지고 만사에 복이 임하게 되며 형통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1-2)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백성이 안전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의 말씀인 성경을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주야로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주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면 금년 바다로 가든지, 산으로 가든지,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안전하고 형통하게 지키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주의 은혜로 2011년에도 만사형통의 복을 부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81. 소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시 37:3-4)

찬송 : 452장(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새 해를 시작하면서 갖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소망을 가졌습니까? 일단은 우리 삶에서의 건강과 평안 그리고 형통의 소망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도 하고 욕심을 줄이기도 합니다. 멋진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이 잘 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궁리합니다. 우리 삶에서 이런 일들이 되지 않는다면 그만큼 어려운 생활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 중에서 두체적인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승진을 한다거나, 집을 사는 일,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는 일 등 구체적인 소망도 있습니다. 우리 가족의 소망, 나라의 소망, 교회의 소망도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이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소망을 우리 힘으로만 이룰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신다면 우리 소망을 절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하나님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고 합니다. 소원을 들어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더 크고 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다윗이 깨달은 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을 본문에서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의지하고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를 의지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 소망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지하여야만 합니다. 이는 나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망을 생각할 때도 나의 소망이 아닌 하나님의 소망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소망을 이룰 방법을 계획할 때도 나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먼저 계획합니다. 나의 유익만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곧 선한 일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망이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러려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합니다. 원수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더 많은 것으로 사람에게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둘째, 성실한 삶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어디를 가나 성실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대충 일하는 것보다 주인의식을 갖고 꼼꼼하게 일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성공합니다. 우리가 땅에서 살 때 한상 유념해야 하는 것은 성실함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주인처럼 일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꾸준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으라고 합니다. 여기 땅에 머무는 동안이라는 말은 이 땅에서의 삶을 의미합니다. 일생동안 성실함이 무기여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작은 일에라도 성실하고, 큰 어려움이 닥쳐도 당장에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성실함입니다. 여기 그의 성실함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 성실의 모델과 기준은 하나님의 성실함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성실하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성실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먹을거리로 삼으라고 합니다. 성실함을 늘 기억하고 사용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함이 우리 삶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함을 외면하면 우리는 양식을 먹지 못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살아가려는 것, 하나님께 소원을 두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며 선을 행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것 등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사람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의 일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디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을 은혜로 주십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성실하게 살아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은혜가 올 한 해 우리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82. 모든 것을 맡기는 성도(시 37:5-6)

찬송 : 351장(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중국 내지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정신적 부담은 밤잠을 설치게 했고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하는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태양 빛이 비취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나무이므로 가지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렇게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시인하고 회개하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는 그 후부터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받고 성공적인 중국 선교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이고 하나님을 의지한 이상 우리 삶의 현장에서 다가오는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다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은행에서 행하는 대여 금고에 맡기면 안심한다고 합니다. 스위스 비밀은행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안전합니다. 맡기면 해결까지 해 주십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문제를 당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다가온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고 불안해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와 같은 문제를 당한 사람들에게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기보다는, 인간의 지혜와, 인간적인 수단과, 인간의 경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치 앞의 일도 알지 못하는 유한하며,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총동원하여 일을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보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므로 참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려면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1.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잠언의 말씀에서 솔로몬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맡기고 살아가는 길이 가장 정당한 태도요, 가장 지혜로운 태도라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생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고, 그의 길을 찾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장난이나 운명의 결과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잘못되고 어리석은 인생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주도권을 온전히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의 생각을 온전히 믿고 그에게 모든 걸 의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2.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는 것을 믿을 때 더 이상 이것보다 완전한 보험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겸손히 나아갈 길을 물을 때 하나님은 예비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 조건,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께 기대를 갖는 사람,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도우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까요?

 

첫째,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참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둘째,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십자가를 참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을 품고 해결하지 못할 때 큰 병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으로 큰 축복과 평안 가운데 사는 성도들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83. 소원성취(시 37:7-8)

찬송 : 569장(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신앙생활을 하면서 갈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떨 때 갈등할까요? 대부분은 하나님이 왜 악한 사람을 내버려두느냐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곧 바로 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악한 일을 했는데도 양심의 가책도 없고 여전히 자기가 잘 난양 뻐기고 다니는 것을 보면 꼴사납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스런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을 내버려두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사람의 마음속에 교만과 어리석음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교만이라 함은 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하는데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움직여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만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어리석음이라 함은 악한 사람을 규정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대부분 자기 생각입니다. 조금 발전되었다면 사회적 통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바로 정죄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뜻대로 악한 사람이 바로 바로 망하면, 세상이 너무 재미없다고 하나님이 왜 참고 기다려주시지 않느냐며 항의할 것입니다. 자기가 항의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른 채 지금 항의하고 있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시편 기자가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유의할 것을 적고 있습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도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모르는 사람도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대로 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권면합니다.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투덜거릴 수 있습니다. 궁시렁대면서 불만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참고 있을 수도 없을 때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불만을 표시해야만 하나님이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잠잠하여 참고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아무 말도 못하니 속이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 기다리라니 무슨 뜻입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침묵하며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해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악한 사람의 존재 때문에 하려는 말씀이 있을 겁니다. 내 생각을 성급히 드러내는 사람보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둘째, 불평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내 생각대로 안 되면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평을 자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불평이 습관화 된 사람은 자기부터 불행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입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과 부조화를 일으킵니다. 나는 의로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갈등하여 죄를 짓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악한 꾀를 이루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의 존재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 더 큰 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선한 사람의 입에 불평을 심어 악한 일을 교묘하게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꾀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 일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누가 방해합니까? 불평하지 마십시오.

 

셋째, 분노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불평을 자꾸 하다가 보면 분노가 생깁니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참고 견뎌야 하는데 한계가 있다면서 언젠가 폭발합니다. 그런데 폭발하고 나면 뒷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더 큰 시험이 닥칩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잘 합니다. 분노할 때도 때와 장소가 있습니다. 상대를 가려야 합니다. 분노를 드러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점잖게 꾸짖는 방법도 있습니다. 공연히 열을 올리고,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이 빨개지는 일을 하는 것이 안 하니만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상황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매우 조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성도들과 교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참고 견디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불평자지 않고 분노하지 않은 신앙인들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잘했다 칭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이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84. 주님의 손에 붙들린 성도(시 37:23-24)

찬송 : 218장(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면 산은 여전히 산으로 남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도록 맡기면 산은 평지가 되고 우리에게 축복의 대로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나중의 베드로처럼 과감하게 주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올인하고 끝까지 순수한 신앙을 잃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두 번쯤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낍니다. 시험을 잘못 치렀다고 생각하는 수험생이 불합격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무엇인가 본인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잘못이 없어도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래를 모르기에 불안한 것은 당연합니다. 불안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안을 걷어내지 못하면 진짜 불행해집니다. 불안을 치유하지 못하면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신음소리를 내게 합니다. 불안에 덥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산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만 붙잡고 살면 우리는 결코 엎드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습니까? 주님의 손에 붙들린 20111년을 사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1. 우리는 결코 엎드러지지 않는 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저'는 '의인'을 말합니다. 37장은 악인과 의인에 대해 결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내용의 정황을 볼 때 25절에 나오는 '의인'을 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의인'(차디크 the righteous)은 '올바른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왕상 8:32).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는 자를 말합니다. 의인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않습니다.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키 이폴 로 이우탈)'한다는 것은 여행하는 나그네가 넘어질 때도 있지만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넘어져 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도 실패와 가난과 병약함이 있습니다. 사건과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역경이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한 환경이 한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 때 실망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아주 포기하거나 멸망 길로 가지는 않습니다. 25절에 보면 성인(成人) 다윗도 경험으로 볼 때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의인과 의인의 가정과 의인의 자손이 일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을지라도 아주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이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에 관해서도 잠시 범죄의 미혹에 빠지더라도 아주 멸망당하기까지 죄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매려두지 않으시고 죄악으로 놓쳐진 손을 회개만 하면 다시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결코 나를 붙잡은 손을 놓치 않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인이 넘어지나 아주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24절).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내용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도록 영역본 KJV, NIV에는 '사람' 앞에 'good'를 넣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의 걸음을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정하신다(포나누)'는 문자적으로 '명령하신다' '지도하신다'이고, '기뻐하신다(예헤파츠)'는 '유지한다'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그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의역하면 하나님께서 의인의 걸음을 계획한대로 인도하시고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신다는 말입니다.

모든 상황을 극복하는 힘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시는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때가 되면 회복시키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시편34:19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고 했습니다. 욥기5:18-19에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이사야41:10에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속에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으로 승리하는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85. 도우시는 하나님(시 46:1-3)

찬송 : 314장(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계곡에 고립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휴대전화로 급히 119에 신고했습니다. 재빨리 구조대원들이 출동했습니다. 그러나 강물이 너무 불어나 로프를 연결하여 간신히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구조대원들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십중팔구는 아까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많습니다. 물이 불어났을 때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죽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피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사는 우리들이 당하는 위험한 일이 많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십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 본문은 고라 자손들이 찬양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과 성품을 찬양합니다. 그 찬양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아름다운 일을 묵상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시편은 이 사실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수 없이 많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난처 되심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이미 경험한 믿음입니다. 경험한 고백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피난처 경험은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한번 지나간 위기라도 다시 올 수 있습니다. 한번 분 태풍이 또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 피난처를 다시 찾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정해진 피난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 피난처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힘이십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 거인 골리앗과 상대하였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용기가 무모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힘이시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힘을 가진 사람이 강합니다.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힘이 누구로부터 옵니까? 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시 29:11).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도움이십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대원의 도움이 있을 때, 안전하게 물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위기를 스스로 탈출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나름대로 위기를 탈피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수고가 헛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연약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도움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우미’가 되어 주십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느끼지 못하여도 환난 날에는 반드시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크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체험하면 평안할 때도 역시 하나님의 도움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며 힘이 되시고 도움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면 어떤 상황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을 들어보셨지요? 솟아날 구멍을 찾아 나오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가능합니다. 범에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정신을 차리면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로 빠져도,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아도, 바다가 흔들려서 산이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합니다. 현대식으로 하면 지진, 해일, 화산폭발, 해저화산 폭발 등의 현상이 생겨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피난처, 힘, 도움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올 한해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86. 맡기면 됩니다(시 55:22).

찬송 : 369장(죄 짐 맡은 우리 구주)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지나칩니다. 그 때 어떤 젊은이가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었습니다. 할머니가 대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거운 짐을 든 사람에게 짐을 나누어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행복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예수님은 짐을 덜어주려고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짐을 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어린아이조차도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책임감이라는 짐이 있습니다.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면 죄책감이라는 짐도 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짐이라도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쉼과 평강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짐을 맡겨버리라.” 하나님이 맡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맡으시겠다니 맡기십시오. 맡아주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안 맡긴다면 믿음이 없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배짱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자기 짐은 자기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패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책임회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것은 책임회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깨의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무거운 고통을 덜어 주십니다. 짐을 맡기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십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도 뒤뚱거릴 수 있습니다. 짐을 내려놓으면서 중심이 흔들릴 수도 있고, 내려놓고 난 이후 너무 힘들다고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죄책감이나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어도 이상하게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후유증 때문에 고달프다고 괴로워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짐을 주님께 맡기어 순종한 사람을 하나님이 모른 척 하시겠습니까? 흔들리고 있는데,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붙잡아 주십니다. 넘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만약에 넘어져 있다면 붙들어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쉼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쉼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십시오.

 

3. 하나님께서 요동치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면 흔들려도 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동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흔들림을 하나님이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닻이 되어 주셔서 폭풍에 흔들이는 배를 안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방파제가 되어 주셔서 폭풍우를 막아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잠시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거친 세파와 싸우자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흔들림이 지속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흔들림 상태로 살도록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데도 흔들린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시는 반석입니다(시 18:31).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29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랬습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 평안이 있고, 주님 안에서만이 참된 쉼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녁에 잠들 때, 내일 낮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인하여 부담스럽습니까? 그러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께 모든 짐을 맡기시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소풍을 앞둔 아이들처럼 들뜬 마음으로 행복한 꿈에 젖은 채로 밤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머리를 무겁게 하는 걱정스러운 일이 있습니까?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께 맡기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루를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늘 걱정과 근심에 싸여.... 그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고통당하시는 분들은.. 이 시간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께 모든 걱정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369장처럼 말입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 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87. 소망을 지닌 성도(시 62:1-2)

찬송 : 205장(주 예수 크신 사랑)

 

믿는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질, 성공, 출세, 권력과 같은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면서 자기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수단과 목적이 바뀐 경우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목적이어야 하고, 물질이아 성공은 수단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 중심의 삶은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허락하는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삶의 용기, 진실성, 담대함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그 자리에 놓지 않는 것이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려는 목표와 소망을 가진 학생은 비록 당장에는 고단하고 힘들지만 참고 인내하며 학업에 열중합니다. 또 장래에 좋은 집에서 호강하며 살려는 소망이 있는 자는 열심히 이마에 땀을 흘리며 노동에 힘씁니다. 이와 같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능히 이를 견뎌내고 참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소망이 없는 사람은 지금 당장 아무리 좋은 집에서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부족함이 없지만 아무런 인생의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소망은 참으로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원리는 신앙생활에서 더욱 잘 적용됩니다. 이에 오늘은 천국 소망을 가슴 가득 품고 살아가는 성도의 생활 모습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봅니다. 천국 소망이 있는 성도는 어려움이 닥칠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세상 수단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합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엄청난 박해 중에서도 인간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차례 있었지만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자신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받는 선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의 태도입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불평하고, 비신앙적 방법을 간구하는 것은 성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사모합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세속적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또한 그것을 불신앙적 방법으로 향유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크고 소중함을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사모합니까? 아니면 오히려 세상에서 오는 복들을 좇느라고 하나님의 축복을 외면하고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전도를 받은 사람 중에 데마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보다는 세상의 축복을 더 사랑하여 신앙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았습니다.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면서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셋째, 하나님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은 사람은 자주 흔들립니다. 삶의 좌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좌표인 사람도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자꾸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좌표로 삼으면 흔들립니다. 사회 현상을 좌표로 삼아도 흔들립니다. 어떤 단체나 지식을 좌표로 삼아도 흔들립니다. 좌표 자체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좌표로 삼으면, 천국을 바라보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만이 반석이요, 구원이요, 요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 위에 서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품 안에 숨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을 이렇게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신앙인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바라봅니다. 하나님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좌절하거나 낙망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신앙인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 가정에 올 한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이 충만히 은총을 내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88. 구원의 영성을 사는 성도(시 70:5)

찬송 : 405장(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누구든지 위기의 순간들을 만납니다. 위기가 닥칠 것을 미리 감지하고 있다면 약간은 고통이 덜할 것 같으나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위기가 닥치면 누구든지 허둥지둥합니다. 때로는 이성을 잃고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면 두 가지 생각을 합니다. 한 가지 생각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고, 그가 가진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런 사람은 위기의 때에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증명하고 믿음을 증거합니다.

 

다른 생각은 위기의 순간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버리고 좌절합니다. 과거에 가졌던 열심과 행복한 것들을 기억할 뿐이지 회복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위기를 자초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갑자기 기습해 온 것을 낸들 어찌하겠느냐고 위기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기를 해결할 수 없으면 그 자리를 피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책임의 소치입니다. 이 시대에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커다란 문제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위기를 이긴 사람들,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위기를 이기지 못한다면 성공도 없습니다. 위기와 성공은 다른 길이 아닙니다. 위기와 성공은 같은 길에 있습니다. 다만 위기부터 만난다는 것이 사람에게 괴로울 것입니다. 위기를 지나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위기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위기를 즐기기까지 합니다. 마치 게임을 하듯이 위기와 맞서서 게임을 벌이는 것입니다. 위기를 게임으로 생각할 정도라면 대단한 담력이고 배짱입니다. 그러나 이런 담력과 배짱을 가진 사람에게 성공이 찾아오니 담력과 배짱을 누구에게 사서라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다윗이 이런 위기를 한두 번 겪었을까요? 목숨의 위기를 겪은 것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고통을 당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백주 대낮에 광장에서 다윗의 후처들을 욕보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왕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왕을 내 놓고 초야에 묻히는 것이 낫지 이런 수치는 사람으로서 단 한번이라도 당하면 안 될 일입니다. 하지만 높아질수록 공격이 거세지고, 야망이 클수록 심각한 위기를 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침착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고 위로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위기에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기야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디서 위로를 받을 것이며, 용기를 얻겠습니까? 가족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족을 돌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가족을 지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족을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족의 안전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구원은 고난을 가져다주는 사람, 고통을 겪게 하는 사람에게 부끄러움과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면, 그것이 악인에게는 수치스러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은혜이며, 복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입니다. 구원을 경험한다는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며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영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만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 구원을 지체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라고 말입니다. 아멘.

 

89.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시 84:11)

찬송 : 560장(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우리 안에 채워진 것들이 있습니다. 이성에 눈을 뜬 젊은이들은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공부 생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돈을 버는 일에 혈안이 된 사람은 돈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채워져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집니다. 인생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채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라 자손들이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인도자의 선창에 따라서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생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 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하시는 일을 말씀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찾아봅시다.

 

첫째, 하나님은 태양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양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태양이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은유법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태양에 비유하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다는 의미입니다. 태양 빛이 사람에게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일할 수 있는 빛을 줍니다. 열에너지를 제공합니다.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도와줍니다. 가을철 벼가 익게 합니다. 태양 빛이 없다면 사람의 사는 모습이 비참할 것입니다. 태양 빛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태양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선물입니다. 의사들이 우울증에 걸린 분들에게 햇볕을 쬐라고 권고합니다. 방안에 앉아 혼자 공상하는 것보다는 햇볕을 쬐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좋습니다. 햇볕은 몸에도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구라파 사람들이 햇볕만 나면 웃옷을 벗고 햇볕을 쬐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햇볕을 쬐어야 합니다. 그 햇볕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햇볕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혼의 햇볕을 받지 못하므로 영적 우울증에 쉽게 걸립니다. 잘 될 때에는 입에 침을 튀기며 자랑해도, 잘 되지 않을 때는 쉽게 절망합니다. 햇빛이 비치지 못하는 어두운 곳은 영적으로 죽음의 세계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하나님의 비취심 아래 있는 사람이 밝게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태양 빛은 모든 사람에게 다 비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빛은 믿는 사람들만이 혜택을 누립니다. 이 혜택이 천국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의 태양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이것을 깨닫습니다(계 22:5).

 

둘째, 주님이 은혜와 영화를 주십니다. 태양 빛을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불신자에게나 신자에게나 모두 은혜입니다. 불신자까지 포함하였으니 일반은혜입니다. 일반은혜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세계 모든 인류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양 빛이라는 엄청난 은혜를 받아가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은혜를 더 받았습니다. 특별한 은혜 곧 믿음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 특별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기회와 자격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사는 우리를 하늘로 끌어 올려 주십니다. 이것을 ‘영화’라고 말합니다.‘영화’는 거룩한 사람의 마지막 상태입니다. 천국에서 누리는 축복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부터 우리를 영화롭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롬8:30).

 

셋째, 주님이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이미 성도들을 향하여 은혜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영적인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쏙 들었는데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지신 것을 우리에게 다 주고 싶어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데 하나님이 무엇을 주저하시겠습니까? 구하는 대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구하십시오. 구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주십니다. 악한 사람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 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어찌 주시지 않겠습니까?(마 7:11).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아십니다. 먼저 믿음을 키우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성도들과 교회에 하나님이 은혜와 영화를 주실 것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적 햇볕을 주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충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90. 환난을 통해서 얻는 교훈(시 86:6-7)

찬송 : 383장(눈을 들러 산을 보니)

 

믿음의 성도들이 때로는 환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복음을 수호하고 증거 하기 위한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닥치는 환난에 대해 바울은 낙심하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신앙의 대장부다운 기개를 발휘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복음의 일들을 감당하다가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인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심한 좌절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게 되기가 쉬우나 우리는 잠잠히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위로의 하나님, 환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얻는 2011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는지 강남 어느 백화점에서는 오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이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나듯이 팔렸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는 마이크로 소프트회사의 빌 케이츠입니다. 이 사람의 재산이 미화로 560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55조입니다. 우리나라의 일 년 예산이 240조이니까 우리나라 일 년 예산의 오분의 일보다 더 많은 돈입니다. 그리고 하루에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사람은 카를로스 슬림이라는 통신회사 사장인데 이 사람이 일 년에 버는 돈이 190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8조를 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1조 5000억 정도를 버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삼성의 이건희 회장으로 29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2조 8000억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에 대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남태평양의 키르바스라는 조그만 섬나라로 일 년 소득이 63불 그러니까 한 달에 5불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5000원 정도의 수입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처럼 때로는 돈 때문에 환난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상엔 환난의 거센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오고 있습니다. 해마다 겪게 되는 수해와, 크고 작은 참사는 우리민족이 당하는 환난입니다. 그렇다면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1. 환난은 “낮아지는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난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이 땅에 그런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고통, 경제적 고통, 질병의 고통, 이별의 고통, 가난의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능력의 종 바울에게도 육체를 괴롭히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그가 받은 계시가 너무 크므로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가시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회가 돼야 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닥쳐오는 환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2. 환난은 “엎드리라는 신호”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예상치 않을 때 위험한 사건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위기를 만난 야곱은 얍복 강변에 엎드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환난의 비바람 속에서 위기를 만난 분은 엎드리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야곱이 당한 위기는 엎드림으로써 해결 받았습니다. 우리도 사업의 위기, 건강의 위기, 가정의 위기, 목회의 위기를 만날 때, 야곱같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3. 환난은 전능자를 만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보다 더 큰 문제가 위기이고, 위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절망입니다. 절망은 앞과 뒤가 꽉 막혀서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포로 2만 명이 수용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무려 8000명이 죽었는데 그 사인은 ‘절망’이었습니다. 또한 600만 명의 유태인들이 학살된 나치 포로수용소 지하 감옥 벽에 손톱으로 그려진 ‘다윗의 별’이 발견되었는데 그 그림 밑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태양이 우리에게 비치지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이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노라.”

 

여러분 가운데 절망을 만난 분이 계신가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홍해변의 모세같이 구부러진 안테나를 다시 세우고, SOS, 곧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에게 닥친 절망은 곧 전능자를 만나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시 118:5)

91. 기도하라(시 88:1-2)

찬송 : 552장(아침 해가 돋을 때)

신앙인들에게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 중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불신자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소원을 비는 정도이고, 기껏해야 간절히 염원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기도합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권면을 매우 많이 합니다. 기쁠 대도 기도하지만 슬프고 힘들고 괴로울 때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권면이 매우 많습니다. 왜냐하면 힘들 때가 바로 기도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의 기도는 특히 부르짖음의 기도가 많습니다. 부르짖음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탄원입니다. 목소리 속에 간절함과 애원이 담겨 있습니다. 목소리도 남보다 큽니다. 누구나 부르짖을 상황을 만납니다. 누구나 고통의 상황을 만납니다. 이 때 할 일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신앙인의 특징이 기도라면 신앙인이 어려움을 당할 때의 특징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 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오늘 본문에서도 부르짖는 기도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며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의 사정을 살피십니다. 우리가 나아갈 바를 모를 때 하나님이 우리의 갈 길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문제에 봉착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해결할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 생명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피할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시대에서 말하는 구원은 위기에서 구출되는 것입니다. 반면 신약시대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를 용서받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합하여 본다면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위기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구출하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도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둘째,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기도를 잘해서, 혹은 기도의 힘이 강해서 주 앞에 기도가 이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셨기 때문에 기도가 주 앞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주 앞에 이른 것은 주님의 받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면 다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주님이 받아주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잘못 기도하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우리의 기도를 모두 받으십니다. 다만 기도한 그대로 들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정한 방법으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며 분별하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여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관심을 갖고 살피는 것을 의미입니다. 어쩌다가 지나가면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 관심을 갖고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친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시편 기자는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인자와 자비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향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올 한 해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기도의 응답이 있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92. 백향목 같은 성도(시 92:12-13)

찬송 : 325장(예수가 함께 계시니)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은 성도의 영적 성숙을 종려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에 비유한 아름다운 시입니다. 종려나무는 한 그루에 수많은 대추야자 열매가 생산되어 많은 사람의 맛있는 식량이 되는 나무입니다. 게다가 성전의 장식그림으로 사용되는 거룩한 나무입니다. 또한 레바논 백향목은 세계적인 고급 목재이며 약 30미터까지 곧게 자라고 그 수명은 1,000년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역시 궁전이나 성전의 건축 재료로 쓰이는 귀한 나무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귀한 존재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유익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제 어떤 방법을 통해 영적 성숙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아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백향목은 향기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백향목은 어떤 나무보다 향기가 뛰어나 모두에게 기쁨을 주며 사랑 받는 나무입니다. 그와 같이 성도의 사명은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옛날 구역시대에도 향기로운 제사를 드렸습니다.(민 29:2) 하나님은 향기로운 제사를 받으시길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발해야 될 향기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모든 사람에게 발해야 될 향기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우리는 가정이나 직자에서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백향목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정직함으로 세상에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백향목의 향기가 뛰어나듯 우리 행위도 뛰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백향목 같은 한 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2. 백향목은 곧게 올라간다고 합니다.

백향목은 땅으로 그 가지를 내려뜨리지 않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곧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말씀만 중심하여 중앙선으로만 가야합니다. 결코 좌우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또 신앙은 아래로 내려가거나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히 10:39)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예, 그렇습니다. 앞으로 가야 합니다.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내려가면 위험합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 불행에 불행을 당했습니다(룻 1:1-5).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욥바로 내려가 배를 탐으로 풍랑을 만났습니다. 성전을 멀리하고, 말씀을 멀리하고, 예배를 멀리하면 시험 듭니다. 내려가는 신앙은 아주 위험합니다. 성도는 찬송가 394장 가사와 같이 독수리처럼 올라가야 합니다.

 

3. 백향목은 청청하며 늙어도 결실하다고 합니다.

(시 92:14)“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시 92:14) 모든 것은 변합니다. 짐승도 늙으면 새끼를 낳지 못하고 조류나 어패류도 늙으면 새끼를 낳지 못하며, 나무들도 나이 먹고 오래 되면 결실이 줄어듭니다. 심지어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도 늙으면 세포가 죽어 주름이 잡히고 머리는 희어지고 기력이 쇠하며 자녀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백향목은 변하지 않습니다. 늙어도 결실 합니다. 성도들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변함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면서 꾸준히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백향목은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늙어도 결실합니다. 참된 성도는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시사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려운 때나 좋을 때나, 또 실패할 때나 성공했을 때나, 바쁠 때나 한가할 때 언제나 변함없이 기도하고 충성을 다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므로 변함없이 결실하는 백향목 같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백향목은 속이 단단하다고 합니다.

백향목은 껍질은 부드럽고 속은 아주 단단하다고 합니다. 껍질이 부드러운데다 향기가 좋아서 벌레들이 많이 날아와 부드러운 껍질 속으로 침입합니다. 그러나 속이 너무 단단하여 나오지 못하므로 거기서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것들이 떨어져 거름이 되어 더욱 잘 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인 나무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부드럽고 관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냉혹하리만큼 엄격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내적으로는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신앙만은 일보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안으로는 확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2011년 백향목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93. 기쁨과 감사의 찬송(시 100:4-5)

찬송 : 270장(변챦은 주님의 사랑과)

 

신앙인의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 중에 하나는 찬송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찬송을 잘 합니다. 찬송 실력이 좋지 않아도 찬송하는 생활을 합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찬송을 부르고, 다른 사람이 부르는 찬송을 듣기도 합니다. 또 집 안에서 라디오나 오디오 기기로 찬송을 듣기도 합니다. 찬송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은혜가 되는 느낌입니다. 찬송을 들으면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저절로 느껴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기쁨이 생기고 어려울 때는 위로가 됩니다. 찬송을 부르면 소망이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삶의 반성이 일어나기도 하고, 벅찬 감격이 올라오면 새로운 생활에 대한 결심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찬송의 생활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감사의 시편 중 일부입니다. 찬송과 감사를 짝을 이룹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찬송합니다.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자고 말하고, 찬송하자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감사와 찬송의 대상이며 내용이며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감사와 찬송을 보고 받으십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서 우리의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더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찬송과 감사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찬송하며 감사합니까? 일반적으로 찬송을 한다면서 엉뚱한 대상에게 찬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미신을 섬기던 시절에는 나무나 돌에게 찬송을 했습니다. 해와 달이나 별에게 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찬송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지으신 분이 찬송의 대상입니다. 누가 지으셨습니까? 바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안다는 것은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의 대상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찬송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와준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사람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감사하면서 마음속에는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통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할 일을 엄청나게 많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가 더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넘치게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송축 받을 이름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사람들에게서 높여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거나 더럽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정죄하십니다. 십계명 제 3계명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낮추는 겸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이 높여질 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높이는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아름다운 성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지하시고 성실하신 분이라고 기록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4절). 하나님은 아름다운 성품으로 무엇을 하실까요? 아름다운 성품은 누군가 대상에게 아름다움으로 사용됩니다. 사용되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외모는 사용되지 않고 가꾸기만 하고 보여지지만 하면 아름다움이겠지만, 성품은 사용됩니다. 사용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사용된 결과에서 아름다움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움 성품을 우리에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사용된 대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이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셨습니다. 선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자함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성실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우리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감사와 찬송이 올 한 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94. 풍성한 은혜 속에서(시 103:8)

찬송 : 310장(아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전 15:10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주를 위해 헌신해 온 시절을 돌아보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다른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부족하고 결함이 많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주셨기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이 커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많아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심이 굳건해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대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대가는 공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공평 할 수 없습니다. 은혜에는 불공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세상에서 살다보니 "은혜"에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은혜"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을 때 그만한 대가(對價)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는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는 것입니다. 은혜는 자격이 있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받는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에는 자격이라는 말 자체가 소용없습니다. 은혜는 하루 품삯처럼 계산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형 에서는 성실했으나 동생 야곱은 교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야곱은 성품이나 행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가 에서의 편에 서 있다면 하나님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야곱의 편에 서 있다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야곱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등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경건훈련을 하거나 자기를 부인하거나 신학을 공부하거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여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한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만하거나 시기하거나 분쟁하거나 살인하거나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는 대가로 주어진 것도 아니요, 자격이 있어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불공평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합니다. 성경에서 은혜 받은 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내가 똑똑하고 내가 더 의롭고 내가 경건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죄악의 자리에서 부르시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뽑아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갚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은 멀리 던져버리시며... 깊은 바다에 빠트리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질이 아주 나쁜 사람들을... 오히려 뽑아내시고... 너는 내 것이라 인쳐 주시며,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2011년에는 이렇게 풍성한 은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95. 심판보다 은혜(시 103:10-11)

찬송 : 422장(거룩하게 하소서)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의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용서가 됩니다. 이상하고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용서가 잘 안 됩니다. 용서가 만일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지는 것이라면, 혹시 우리가 죄를 지었더라도 대가를 지불하고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지은 죄를 하나님께 충분한 값을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 과연 어떻게 그 충분한 값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에게서 대가를 받을 숭 없어서 아들을 대가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서 받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은 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고 싶어집니다. 은혜를 받고 싶은 것은 모든 신앙인들의 바람입니다. 불신자들도 은혜가 무엇인지 알면 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은혜 받을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있어도 결심하지 않습니다. 받고는 싶어도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혹시 우리가 그렇지는 않습니까? 은혜를 받을 기회가 오면 잡으십시오. 은혜가 누구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누구를 통해 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누구에게 옵니까?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은혜 받을 기회도 깨닫게 하십니다. 그 기회를 잡게 하십니다. 믿는 사람은 은혜의 우선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은혜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본문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을 더 자세히 알고 은혜를 받읍시다.

 

첫째,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처벌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따라 처벌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율법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합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면 그의 이도 부러져야 하고, 남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도 상하게 되는 일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제도가 발전하면서 법률이 생긴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잘못에 대한 형벌을 국가의 법률로 정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남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남을 처벌한다면 이 사회가 혼란 속에 빠질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따라 하나님이 그대로 처벌하신다면 이 사회에서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죄악을 그대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죄악을 그대로 갚지 않으셨다 함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잘못한 것을 용서받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용서받지 못한다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가슴 깊이 뉘우치고 있는 사람에게 용서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이 땅에 살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큽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한 가지씩 일일이 묻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알고 계시면서도 모른 척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용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물이 덤으로 주어졌습니다. 천국의 선물, 영생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큽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적 질서입니다. 이 세상은 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며 혼돈의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사람도 질서 속에 있습니다. 우주의 질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늘이 땅보다 높습니다. 동시에 영적 질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영적 질서 속에 살기 원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영적 질서가 주어진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 받을 교회가 있고, 신앙을 지도해 주는 교역자가 있는 것,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있고 그들을 보고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가게 하는 질서들이 모두 은혜의 선물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질서를 알고 거기에 따라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자하심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96. 경외하는 자가 받는 하늘 복(시 115:12-13)

찬송 : 31장(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2011년을 살 수 있는 생명 연장의 복을 주시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거는 소원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2011년을 살면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살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병에 시달려 일찍 생을 마감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잘살고 당신을 경외하면서 복되게 사는 것 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무론하고 여호와에게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그리고 이여서 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무조건 아무거나 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요삼2절의 말씀처럼"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올 해 2011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복을 주십니다.

왕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왕같은 복은 세 가지입니다. 영권과 축복권, 그리고 말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은 인간의 골수와 관절과 혼과 영을 쪼개는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히4;12}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고 교회가 세워지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영권은 사탄을 쫓아내고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요. 축복권은 성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것 과 땅의 기름진 것 들을 축복하는 권세요. 말씀의 권세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변화되고 변화되는 권세입니다. 이런 복을 받은 우리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함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영육간에 강건함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물질의 복을 주십니다.

물질이 따라주는 것은 "물통"이라고 합니다. 물질의 복은 전부가 "신통해야 물통"합니다. 물질은 들어오고 몸에 병이 들어 뒤로 나가면 복이 되겠습니까? 앞으로 벌고 뒤로 깨지면 되겠습니까? 그럼 믿는 자가 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3: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시험하지말라고 했는데 십일조만큼은 시험하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복을 받는 첩경입니다. 목돈만 들려면 은행에 저축해야 합니다. 못입고 못 먹어도 저축하면 목돈이 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그보다 더 안전한 저축입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심으면 거두고. 행한대로 받습니다. 사업이 잘 되기를 원합니까? 가게가 잘 되기를 원합니까? 토지소산이 잘 되기를 원합니까? 안전한 삶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하신 것만 지키면 하나님은 어김없이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물질의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3. 복 받은 자격이 이쓴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복입니다. 내가 곧 복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 들어 있으므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중에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을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복 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가 그 대상입니다. 아론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 들어 있으므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집을 제사장으로 택하셨습니다. 제사장 가문은 복을 전하는 집안입니다. 복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벧전 2:9). 어찌 아니 기쁜 일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는 2011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경외함으로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무리는 한 해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복 받을 짓을 해야 복을 받는답니다.” 사람의 세계에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는 순서가 틀렸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받을만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누구입니까?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보다 믿음을 먼저 보십니다. 우리의 조건을 따지지 않으시고 믿음을 먼저 찾으십니다. 사람은 조건을 따집니다. 자격을 따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대상입니다. “대소 무론하고” 먼저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 안에서 복 받을 사람으로 키워주십니다. 하나님의 키우심과 복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97. 승리의 노래(시 118:7)

찬송 : 549장(내 주여 뜻대로)

 

하나님을 믿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말로 해서는 설명이 잘 안 됩니다. 그럼에도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를 통해 설명이 되고, 간증을 통해 이야기됩니다. 말을 듣는 사람들이 그 말 속에 담긴 듯을 이해합니다. 감동을 받기도 하고,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고 결단하기도 합니다. 혹은 글을 통해 믿음이 필요와 믿음의 중요함을 알리기도 합니다. 글을 읽는 사람들이 감동하고 믿음의 결단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과 글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말과 글의 내용과 요소를 제공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감동받을 수 있도록 먼저 조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시이고 노래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정제하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그 표현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시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은 먼저 경험한 사람이 그 경험을 담아놓았습니다. 우리는 시와 글과 말로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을 전해 듣습니다. 오늘 시편을 통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새겨봅니다.

 

첫째,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할 때 힘이 있고 돈 많은 사람이 와서 도와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강한 사람 하나가 와서 내 편을 들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초등학생들이 편을 나누어 축구를 하고 있는데, 국가대표 축구선수 하나가 와서 어느 편에서 뛰어주겠다면, 학생들의 서로 자기 편 되어달라고 할 겁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으니까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내 편을 들어줄 분이 필요합니다. 직장에서 시달리고, 생존경쟁과 같은 시대에 나를 진정으로 위로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위로해주는 척 하지만 자기 실속을 차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조차도 나를 위로하지 않고 공격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편이 되어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나를 돕는 사람들 중에 계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 나의 편이 되어 주어도 우리는 무엇을 얻은 것보다 더 기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돕는 사람들을 많이 붙여주시고 그들 안에 계신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위하여 돕는 사람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돕는 사람을 예배해 두셨습니다. 성전의 제사장이나, 군대의 장관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으로 그들을 통해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돕는 사람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이 돕는 사름들 중에 계심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들을 돕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분들이 서로를 돕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사회에도 있습니다, 사회가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를 돕는 현상입니다. 사회의 부조리나 욕심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 같으나 우리가 그것을 잘 예상하고 대응한다면 사회가 우리를 돕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셋째,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을 보응하십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다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유혹을 하는 사람, 선을 행하지 말고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 믿음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며 환란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자들을 향한 범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범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향하여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인의 편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잠자코 계신 것 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앙인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다.

우리가 약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지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수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셨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성도들과 교회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임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올 한 해 충만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98. 하나님께 신뢰받는 믿음이란?(시 118:8-9)

찬송 : 280장(천부여 의지 없어서)

 

나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으며, 저 사람은 나를 얼마나 믿어 준다고 생각하며 사십니까? 사실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뢰성이라는 것입니다. 신뢰는 내가 그를 온전히 믿으면 그도 나를 믿어 줄 때 생긴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가 못 미더운 것은 내가 그를 못 미더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를 전심으로 사랑하면 그도 틀림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데서부터 사랑은 이루어집니다. 동물은 신뢰성 없이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계경제가 어려워지고 나라경제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가장 많이 듣는 용어가 신용평가, 신용등급, 신용지수라는 말일 것입니다. 국가 신용도에 따라서 자금을 빌려주기도 하고 회수하기도 하겠다는 것이요, 투자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이 국가신용등급이 좌우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신용등급이 높지 못하면 아무리 우량기업이라도 결국엔 신용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국가신용등급은 무엇을 기준으로 매겨집니까? 크게 정치적인 요소와 경제적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정치적요소란 정치체제의 안정성과 정통성, 국가안보상 위험요인이 얼마나 되느냐를 보고 결정합니다. A 등급 B등급 그리고 A에도 ++ 가 몇 개 인가에 따랄 신용도가 달라집니다. 내가 나를 얼마나 신뢰하느냐,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신뢰도는 얼마나 되느냐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한 나의 신뢰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의 신뢰도 등급을 매긴다면 얼마나 될까요? 또 신뢰도를 높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믿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지적 동의 이상입니다. 믿음은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흔히 믿음을 지적 동의와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적 동의와 신뢰의 차이점을 비유를 들 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낙하산을 메고 직접 공중에서 낙하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 분은 낙하산의 안전성을 믿을 것입니다. 성공적으로 낙하하는 모습들을 거듭 보았기 때문입 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실제로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 다면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지적 동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낙하산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낙하산에 자신을 내어 맡길 만한 담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뢰란 무엇입니까? 믿고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실제로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못한다면 그 믿음을 깊은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2. 믿음이 하나님의 신뢰도를 높여 줍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믿고 의지하여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고난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 한 천국에서 살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절대적 속성이므로 영원 히 변치 아니하며,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의 언약하신 말씀의 성취를 통하여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지 않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언제나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광대무변은 공간과 관련된 하나님의 실재이며, 무소부재는 피조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실재입니다. 그리고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는 특별한 임재를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위로하시 고, 치료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어떠한 처지에서나 소외감을 가지지 않으며 외롭지 않습니다.

 

3. 신뢰가 없는 사람은 믿음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사람과 온전히 신뢰한 사람에 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곤경에 처하면 불신자와 다름없이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불신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과 권능과 임 재를 신뢰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려움 에 처하면 하나님께 불평, 원망하기를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신실함과 권능과 임재를 신뢰했습니다. 앞뒤 좌우가 다 막혀도 낙심치 않고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서 담대히 행하자 그 앞에 홍해도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2011년에는 만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믿음을 사는 한 해가 되면 하늘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아멘.

 

99.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생활(시 119:1-2)

찬송 : 426장(이 죄인을 완전케 하시옵고)

 

하나님 우리 인생들의 모든 행동과 마음의 생각과 중심까지 꿰뚫어 살피시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시편 33편 13절로 15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행동만 아니라 마음의 중심까지도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위선자가 되기도 하고 불행과 패배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라 영(靈)이시므로 우리 눈에는 안 보이시지만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며 우리 마음의 중심까지도 지금 이 순간에 살펴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바르게 행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받아서 하나님의 소원을 행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복된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따라 행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을 받은 대로 복된 일을 행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복된 생활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인지, 복된 사람은 어떤 일을 행하는 지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복된 사람은 말씀에 따라 행합니다. 복된 사람은 살아가는 기준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그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행하라고 하신 말씀,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복된 사람은 삶의 원칙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원칙, 하나님의 이름을 드려내려는 원칙, 하나님을 우선으로 내세우는 원칙 등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의 기준과 원칙이 갖추어져 있습니까? 복된 사람은 따라갈 일과 따르지 않아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따를 것을 따릅니다. 본문에서 복된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함이 완전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과 원칙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복된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그 복을 따라 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복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복된 사람입니다.

 

둘째,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를 지킵니다. 복된 사람은 생활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을 지킵니다. 복된 사람은 생활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은 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은혜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립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하지 말라는 것을 더 하고 싶습니다. 나쁜 일에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를 삶에서 지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증거가 완벽하다는 사실을 말과 입으로 증명합니다. 그의 삶이 풍요롭고 넉넉한 것보다 반듯하고 질서가 잡힌 사람으로서 복된 사람이라고 보여 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셋째, 복된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합니다. 복된 사람은 마음에 복된 것을 품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품고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것도 전심으로 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좋고, 안 주시면 말고 식의 구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 주시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구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맞는지도 스스로 살핍니다. 복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자세와 태도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향하여 복되다고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과 태도가 하나님께 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주고 싶으셔서 더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 이렇게 좋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믿으면 됩니다.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복된 사람으로 살아갈 방향이 있습니다. 기준과 원칙이 있습니다. 경계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복된 생활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피셔서 복되다고 인정하시는 은혜가 올 한 해 우기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00.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본 고난(시 119:71-73)

찬송 : 272장(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잘못된 길로 가다가 고난을 통해서 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듯이 고난은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쓴 약과 같습니다. 고난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긴장하게 되면서 창조적인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잡이를 하는 영국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북해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런던에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가지고 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어부들이 아무리 잘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한 어부만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들을 싱싱하게 산채로 런던에 가지고 와서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동료 어부들은 이상하게 여겨 그 비법을 물었더니 그 어부가 고민 끝에 말하기를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어부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모두 잡아먹지 않소?”라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만 두 세 마리밖에 못 먹지요. 그러나 그 통에 있는 다른 많은 청어들은 잡혀 먹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열심히 헤엄치며 살려고 애를 쓰지요. 그래서 청어들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청어를 잡아먹는 메기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청어를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인 것처럼, 이 세상에 고난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바른 삶,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고난이 주는 의미를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 된 우리의 삶을 바로 잡아 주는 좋은 치료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수술 받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수술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잘라 낼 것은 잘라 내고, 바르게 할 것은 바르게 함으로 병들었던 몸에 다시 건강을 얻게 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고 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깊이 병든 우리를 보시고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것 같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려고 고난을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며, 동시에 그 죄로 말미암은 병을 고치시려는 사랑입니다. 자식의 잘못을 벌하는 아버지의 채찍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식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그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 잘못을 돌이키게 함으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그 채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이라는 고난도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현대인의 병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창조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인간의 욕망대로 살아가는데 그 병의 원인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병은 물질문명의 병입니다. 인간의 육체만을 위하여 발전시킨 물질문명이 바로 인간의 영을 병들게 하였고, 영이 병들면 결국 우리의 삶 전체가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의 한 부분이 아프면 그곳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아프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 아픔 때문에 위축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영이 병들 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이 무지를 일깨워 주는 각성제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고난이 올 때 더욱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지난날들을 반성하면서 영적 각성을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도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영적 각성을 위해 노력할 때 고난은 물러가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고난을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을 따라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시는 초청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우리가 살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주시기 위한 채찍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교만과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임과 동시에 우리를 그 병에서 건져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범죄 하였기 때문임을 알고 회개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고난을 통해 믿음이 자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분명하게 보시며, 그 말씀을 좇아 아름다운 삶을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닥치면 포기합니다. 절망합니다.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위로와 평안을 얻고 사랑의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출처 : 천국 네비게이션
글쓴이 : gem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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